‘틀림’과 ‘다름’의 관점?
‘틀림’과 ‘다름’이라는 두개의 극명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야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판단하려하는 선악과와 질서와 조화의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의 역사인 영원한 생명과를 바라보는 관점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틀림’으로 반응할 때 마다, 사탄의 죄와 사망의 불순종의 자식이 되는 것이고,
‘다름’으로 여길 때 마다 하나님의 생명과 순종의 자녀로 구별 되는 것이겠지요.
‘틀림’은 혼돈과 공허인 깊은 흑암 상태의 속성이 나타나는 열매이고, ‘다름’은 빛으로 창조된 성령의 열매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어둠과 빛, 육과 영, 옛 사람과 새 사람, 겉옷과 속옷, 알곡과 가라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은혜 등으로 ‘틀림’과 ‘다름’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육이라는 겉옷을 입고 있으면서 세상 중력에 지배 되고, 시공간 좌표에 매여 있는 한, 절대로 ‘틀림’의 부분적인 관점에서 ‘다름’의 온전한 관점으로 후딱 변신 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은 중력과 시공간을 초월한 영적 존재이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완료형으로 나타내기가 불가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의 역사, 즉 ‘다름’의 의미를 완성한 상태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틀림’에서 ‘다름’의 성숙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다다르기 위한 점진적인 자람의 현재 진행형의 과정을 시험(Test)이라는 수단을 거치면서 단련 되어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쇠를 제대로 단련하고 모습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용광로에 녹이고,
정제해서 찬물과 망치로 차례로 담그고 두들기는 과정이야 말로 틀림과 다름을 번갈아 가며
경험해야 하는 성숙한 인생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틀림이 나쁘고 다름이 좋다는 호불호의 차원이 아니라, 근본 인간의 속성이오,
운명이라는 깨달음이 소중하고, “우리의 약함이 강함 된다”는 바울에게 주신 교훈을 새롭게 여기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틀림’으로 늘 어둠 속에 거하면서 고민하는 가운데, ‘다름’이라는 빛을 향하여
한 걸음씩 걸어가는 천로역정이 우리들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린도후서12:10>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5>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한복음 3:6>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한복음 3:16-19>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