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Well Dying)의 철학?
육은 마치 영에 짐을 덮어 씌운 것과 같다. 자유로운 영혼에 올무를 지운 게 육이라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육의 쇠사슬에서 자유로을 수가 없다 하겠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고난의 바다, 즉 고해에서 헤어날 도리가 없다.
어쩌면 고해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작업은 육에서 떠나는 일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어보인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줄곳 육을 죽이기 위한 핍박과 자신을 부인하게 하는 시험의 연속 밖에는 다른 교훈은 없지 않은가?
이것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 행위에서도 예외없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겠는가?
재미있는 사실은 영이 육의 틀에 갇히게 될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긍휼이라는 감정은 전적으로 육의 틀에 갇힌 영에 대해서만 가지는 특별한 현상이 아닐까?
죽어야 비로소 사는 것이 영이라는 사실은 바로 육에 갇혀 있는 영을 가르켜 일컫는 가르침일 것이다.
죽는 것은 육이요, 이에 따라서 사는 것은 바로 육에서 해방 된 영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육체의 죽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가 기뻐하고 사모해야할 대상이 아닐까?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슬픔의 초상 장소가 아니라, 기쁨으로 나누는 축제의 장이 되어야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있는 인생에게는 사실 육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하드라도,
즉 살아서도 인생이 고난이 아닌 즐기고 나누고 배려하는 기쁨과 감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를 ‘영이 살아 있는 인생’이라고 하고, 죽음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축복이라 하겠지만, 영이 깨어 있기 위해서는 늘 높은 차원의 삶에 대해서 고찰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필자가 나리는 결론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수행 되는 은혜의 인도함이라고 결론 지을 수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현대에 와서 누구나 염원하는 ‘월빙(Well Being)’과 ‘웰다잉(Well Dying)’의 성취는 모두가 우리 하기 나름이고, 이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의 존재에 대한 제대로 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마음판에 새겨서 즐거운 인생을 영위하기를 기도해 본다.
♡ 응재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