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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실존의 고민, 달리 천국은 없다?

“전제: 고민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고민이다. ‘신’ 앞에 벌거벗은 인간으로서의 고민.

또, 다른 하나는 실존적 고민이다. 현실에서 로고스를 지켜내면서도, 어떻게 고난을 덜 받고, 또 존재적 실존적 기반이 다른 사람들끼리 인화하며 살 것인가하는. 내 생각에는 실존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 실존이 없으면 그냥 ‘spirit’일 뿐이다.

질문 :  ‘spirit’은 정말 실존이 없는가? ‘spirit’ 으로서 살기 위해 실존적 고민을 할 것 같다.  뭐야? ㅎㅎ”
– 더스팽님 –

실존이 존재에 포함 된다는 의미로 보이네요? 존재는 영겁의 의미이고,
실존은 시공간의 현실 문제로 보이네요. 존재는 하나님의 문제로, 실존은 인간의 문제로 구별하는 것?

“글쎄요. exist 와 be? 서로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일까요? 영의 being 을 위한 필사적 질문,
혹은 탐구가 existing 적 질문이라는 입장인데.. 정리가 잘 안되요. ㅠㅠ”

존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면에서 고려되는 것이고, 실존은 인간 간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 같이 기술하신 것 같네요. 그런데 exist 와 being 의 의미라면,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도 같네요.

“사실, exist 는 존재, being 은 실존으로 제 머리에 들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spirit의 실존을 위해서는 존재적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즉 영과 육의 생존은 다 중요하다? 부활 때에도 ‘육’이 살아난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영이 먼저 정의가 되어야지요. 영은 존재적인 원천입니다. 그리고 실존도 크게는 존재 안에 포함 되기에 실존의 문제에서도 육과 더불어 영이 지배하는 거지요.

육과 영을 분리하는 자체가 사실은 세상적인 단견에 의해서 나오는 생각이지요. 더 크게 생각하세요. 사실 “존재만 있고, 실존은 없다”라는 의미를 먼저 고민하고 정의하면, 모든 의문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이는 영원에 대한 찰라의 순간을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를 가질 수 있어요.

영원을 진리로 보고, 실상으로 여기고, 그 외에 영원에 포함 된 모든 현상을 허상과 그림자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비교 해석을 가집니다.

결국, 진리인 영의 세계에서는 존재라는 의미만 가치를 가지지, 육의 의미를 가진 실존의 의미는 그 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과 영을 같은 차원에서 바라 보고자 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은 한낱 인간적인 허무한 시도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요.

장차, 예수님이 구름에 싸여 돌아 오실 때, 육으로 오실지, 영으로 오실지는 하나님의 소관으로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위에 언급한 영의 위대함을 고려하건데, 육의 의미는 우리 인간적인 낮은 관점에서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저는 종교적인 것은 사실 잘 몰라요. 공부한 적 없어요. 저는 저의 흙 되는 육체의 유한성 때문에 괴로워요. 생령만으로 생명일 수는 없으니 하나님께서 육체를 만드셨을 것같다는 생각을하기 때문인데. 육체가 늙어가면서 괴로워요.”

ㅎㅎㅎ 사실, 영혼육을 따로 정의 된 것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지요. 그리스 철학에서 부터 영의 의미를 부여해서 점차로 학문적인 체계로 발전 되다가, 극히 최근에야 영을 종교의 전유물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제는 영을 알려면, 깊이 종교의 내부로 들어 오지 않으면, 그 실상을 알기가 어렵게 된 게지요.

결국,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고뇌는 신의 무한성으로 다가가는 선한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입니다. 어쩌면 먼저 세상과 하늘을 구별하는 것이 인간이 하늘로 다가가는 근본 수순이지만, 결국은 세상은 사라지고 하늘이 정해진 이치로, 진리로 자리매김 되는 겁니다.

번데기가 그 껍데기인 허물을 버리고 나비가 되어 날아갈 때에 더 이상 껍데기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조물인 사람도 번데기와 나비로, 세상과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구별이 되는 거지요.

세상 사람, 번데기 과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이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알고 있지만, 하늘 사람, 나비 과에 속한 사람들은 “바람(생령)으로 와서 바람으로 간다”고 하는 것으로 구별 되지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자락인 흙으로 떨어지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은 나비가 되어 창조주 하나님으로 다시 회귀해서 날아가는 겁니다.

인간적으로는 누구나 ‘실존’이 바탕이 되어서 ‘존재’로 나아가기에,여기에 실존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겁니다. 마치 세상을 의미하고 실존에 해당하는 성경의 구약을 시작으로 해서 존재와 진리와 하늘에 해당하는 신약으로 완성 되는 것과 의미를 같이 합니다.

“뜬금 없는 소리같지만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현실에서도 치열합니다.  그들이 존재와 진리로 훨훨 나아가는 존재임을 모르기에 그렇게 싸우는 걸까요?”

재미 있는 상상이네요. 전쟁과 평화, 선과 악, 세상을 의미하는 가라지인 구약과 하늘을 의미하는 알곡인 신약,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와 같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지요.

이는 마치, 우주의 법칙인 주자학의 음양의 법칙이고, 현대 철학이 주장하는 정반합의 의미와도 같습니다. 어쩌면, 그 의미를 창조원리에서 찾으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창조의 원리는 질서와 조화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애요. 요즘 뜨고 있는 스토리 텔링을 위해서는 희로애락과 생사화복과 같은 서로 상반 되는 성격의 대상을 엮어서 결국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 같이, 어둠과 빛의 갈등 구조로 인류 역사의 실존 내지는 존재론적인 조화를 완성한다는 의미의 관점으로 전쟁과 평화의 현실, 불행과 행복의 반본 되는 뻔한 현실 이야기들을 바라 봐야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실존에서 존재적 의미로 피조물인 인성에서 신성으로의 회복이 주제가 아닌가 여겨 집니다.

‘새 창조’를 위해서는 ‘처음 창조’를 파괴해야하는 ‘창조적 혁신’의 과정에서 전쟁이 묘사 되는 것입니다. 세상 싸우는 전쟁과 불행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어떤 의미도 부여할 이유가 없겠지요. 모든 게 사라질 과정에 지나지 않기에…

“음, 사라진다는 것에 대하여는 더 생각을 해보고 싶은 입장입니다. 그들은 지상천국설을 믿고 성지인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일 듯도 하구요. 사실 지상천국설이 맞을지도 모르자나요? 그리고 자신의 전쟁과 그 스토리는 찬양과 보상의 기본으로 가지고 가는 것 아닌가요?”

모든 현상이 창조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미리 예비하신 섭리의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상이 천국이 될지는 천국으로 누리고 사는 자만이 아는 문제이겠지만, 결국은 그것도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속한 문제입니다.

한치 앞도 예측불가인 우리 인간들이 세세히 따질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속해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깨달음의 축복에 충실하게 만족하며 전능자이시고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신앙인의 자세가 바로 천국이지요. 달리, 천국은 없습니다.

“옳으신 말씀 같습니다.
많은 가르침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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