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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랑에도 지킬 매너와 체면이 있다!

2013.03.06

“사랑은 국경이 없다”고들 한다. 이에 대한 나람대로
여러 갈래의 해석이 있겠지만, “사랑은 허다한 것을 덮는다” 라는 성경말씀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부연해서 살펴보면, 사랑에는 조건도 없고, 가로 막는 벽도 없고, 무엇 보다도 부끄럼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사랑이 모든 것을 덮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랑도 인간의 굴레 안에서 굴러 가려면, 상식 안에서 일정한 트랙을 밟아야 한다.

상식을 넘어서는 사랑은 결국 폭주하는 열차와 같이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모든 것을 믿고 소통을 한다고 해도 지켜야할 기본적인 선, 즉 매너는 더욱 지켜져야 한다.

우연히 개를 안고 동물 병원을 나오는 주부를 보았다. 언뜻 개를 다루는 폼으로 보아서도 개를 무척 사랑 한다는 것을 알아 채릴 수 있다.

왜, 사람들 관계보다, 개와의 친분 관계(?)를 더 편해할까? 를 생각해 보니, 개에게는 용모나 얼굴에 관계 없이 편하게 대해도 무리없이 친구의 관계를 편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깊이가 깊을수록, 자기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보이고자 한다. 흩어진 모습 보다 최고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또한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이 경우는 사랑에도 지킬 체면으로 인하여 편하게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랑이란 매너와 체면의 틀 안에서 세워 지는 건축물
이다!

(둘째, 인간의 용서와 신의 용서!)

인간의 용서와 신의 용서가 서로 충돌할 때, 나타나는 황당함을 잘 표현한 영화가 ‘밀양’이다.

이창준 원작의 ‘벌레 이야기’를 각색해서 이창동 감독이 영화로 올린 것이다.
여주인공 신애로 나온 전도연이는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나는 무엇이고 또 신은 누구 인가? 에 대한, 의문을 던진 영화였다.
감옥에서 자식을 죽인 살해범과의 해후에서 살인범은 신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신애는 망연자실한다. 누가 자식의 죽음을 보상
하며, 또 자식을 죽인 당사자를 피해자인 자기 외에 누가 그를 용서한단 말인가?

남편도 자식도 다 잃고, 의지할 곳이 없는 신애는 종교에 귀의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 하기로 맘을 먹고 살인범을 만났는데 정작 살인범 자신은 이미 신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신애의 입장을 무색하게 했으니, 신애는 마지막 남은 용서할 권리마저 빼앗긴 채 망연자실 하게 된다.

이창준의 원작은 용서 대신에 복수를 하고자 했고, 또 원망하는 대상이 신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사회의 조직, 즉 사법기관을 대상으로 잡고 있다.

자식을 죽인 원수 마저도 갚지 못하게 감옥에서 보호해 주고 있다는 내용이다.
신애의 경우를 예로 들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영화의 주제인 것 같다.

남편과 자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식을 죽인 살인범에게 조차,
복수는 커녕 기껏 할 수 있은 용서조차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파 해친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려 본다.

마지막 신애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자르는 장면에서 영화가 주는 의도는 인간은
결국 자신의 연약함의 한계를 깨닫는 깨달음 외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듯 했다.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신의 입장에서 보면, 신애 주위에 일어난 사건은 ‘모두 다 무의미하게 일어난 우연의 사건’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서 ‘신애가 신을 만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여, 원수를 용서 했다’ 라는 사실만 남는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과연, 신은 있기는 있는가?
신이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신과 나 사이에 어떤 관계 설정을 하여야 하며, 또 역으로
신이 없다면, 과연 인간은 신의 역할을 누구를 통해 어떻게 구현해야 하겠는가?

어쨌든, 신의 신성은 인성의 어떠한 행위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신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인성의 중심을 통해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영혼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는 진리를 엿볼 수 있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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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 타자의 문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타자가 폭력적인 존재라면 내가 겪어야하는 지옥은 훨씬 더 큰 지옥이 될 것입니다. 청년기는 타자와 타자의 폭력성에 대해 깊게 사고하게 되는 때입니다. 기독청년들은 그 문제에 더해 용서의 문제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통해 길을 찾아보지만 가슴 시원해지는 답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세 개의 길잡이를 선택해 보았습니다.

  그 첫 번째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책「배제와 포용」입니다. 저자는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자신의 동족을 무참히 짓밟은 세르비아의 군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라는 진지한 고민으로부터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볼프는 이 책을 통해 폭력의 시대 속에서 용서와 평화의 길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청준 선생님의「벌레이야기」입니다. 이는 <밀양>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요 이 역시 타자의 폭력성과 용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특별히 나에게 해를 끼친 이를 내가 용서하기 전에 신이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신에게 그런 권한이 있는 것일까요?

  세 번째는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단순히 불순종한 한 예언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나서는 폭력적인 타자,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단위의 폭력적 타자 앞에 노출된 약자의 이야기입니다. 요나서는 섣부르게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용서를 강요하는 신과 그에 불응하는 약자의 모습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위 세 길잡이들을 통해 타자, 타자의 폭력성, 용서에 대해 이전보다 깊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의 폭력성을 깨닫게 해주길 바랍니다. 또한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 주길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럴 수 있다면, 자신의 폭력성을 깊이 인식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이전보다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면 우리는 평화에 한 발 더 다가갔다 할 수 있겠죠. 그런 바람을 가지고 이 강좌를 엽니다.”


기독청년아카데미 http://www.lordyea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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