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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적 양면성의 의미, 율법과 진리?

2014.03.04

율법 앞에서 죄를 피할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세상에 선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하신 예수님 말씀의 참 의미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율법이 악해서 우리를 죄인시 하는 게 아니라, 원래 우리가 본질적으로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의 참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우리들의 죄를 훤히 밝히는 반면교사인 진리의 의미를 가진다. 율법은 예수님 자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했다.

십자가 상에서 보혈의 피로 구원(율법)을 완성하신 자신을 일컬어 “다 이루었다(완성하심)”고 하신 것이다.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율법이요, 진리이시기에 누구도 생각 못하시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라고 하신 말씀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 또 “선하신 이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의미를 갈파할 수도 있다.

예수님 이름의 의미에서 내포하고 있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과 죄를 드러나게 하는 거울인 ‘율법’과 동일시하는 것은 서로 이율 배반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이는 동전 양면의 속성과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공의로우신 것과 같다. 공의는 사랑을 전제로 하기 위한 것이다.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죄인 됨의 회개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죄가 없는 곳에 율법이 필요 없는 것 같이, 죄인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고, 또한 예수님 역할이 필요 없게 된다.

첫째 아담의 죄가 없었으면 창세 전에 계획하고 예비하신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등장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로 찬양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그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찬양의 주체자인 피조물인 사람이 한량 없으신 하나님 은혜를 먼저 깨닫는 깨달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 절차는 ‘죄의 유입’이라는 명목으로 다리를 놓으시게 하셨다. 죄는 은혜로 넘어가는 다리로 세워진 것이다. 죄가 없는 곳에는 은혜가 없다. 마치 공의가 없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새 예루살렘 성에서 마지막 생명 나무의 등장은 창세기에서의 선악과의 도입이 필연적으로 설정 되어야 하는 이유와 같은 원리가 된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한 것처럼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너희가 죄를 더 하겠는가?” 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은혜를 사모한 나머지 일부러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인간은 본래 악하기 때문에 은혜와 상관 없이 죄를 짓고도 죄를 짓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셨지만 구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죄인 임을 깨닫게 하고 회개 시키시기 위해서 완전한 율법으로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영혼 구원에 대한 전략은 병 먼저 주고, 후에 약 주는 격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율법이라는 잣대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실체를 깨닫게 하고, 그 죄의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두 손 높이 들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흔히 가르치는 ‘성화’란 의미는 은밀한 의미에서는 죄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부정한 존재임을 확정짓는 일련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로 인간에게 성화란 말을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성화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절차가 진정한 성화의 시작이고, 또 끝이 되어야한다. 성화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은혜로 성령으로 감동 감화 받아서 인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데, 다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체가 되어, 우리를 통로로 해서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은 성화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된다. 성화란 성령님을 나타나심으로 표현되는 현상일 뿐이지, 인간 스스로의 어떠한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는 어떠한 선한 의도의 행위나 노력으로도 스스로 변하거나 성화될 수 없는 한심한 존재라는 진실을 받아 들이는 것이 ‘참 성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익한 피조물이고, 토기쟁이의 목적대로 쓰이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토기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성화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뿐이다.

토기 그릇 안에는 토기쟁이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인 거룩한 성령이 담겨져서, 이를 필요로하는 목마른 영혼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제공하는 그릇으로 사용 될 뿐이다. 그릇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릇 안에 담긴 성령이 거룩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성화의 과정이란, 그릇이 담고 있는 성령이 외부의 육적 파편으로 인해 오염 되지 않도록, 주님 앞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깨달음과 회개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안응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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