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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부활의 삶?

“결국 부활의 삶이란 ‘나’는 사라지고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활은 ‘세상’은 사라지고 ‘나’만 살리는 부활이다.

이처럼 우리는 죽어서 영복을 누리는 부활이 아니라, 지금 사는 동안에 겪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면서 그리스도와 영원하신 하느님을 닮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땅과 재물과 명예의 노예가 되어 사는 길”을 접어야 한다.

죽은 다음에 올 육신의 부활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는 동안에 무덤을 파는 일일 뿐이다. 이제민 신부는 마지막으로 “설혹 고통을 주는 십자가가 나에게 온다 해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것, 이렇게 제 몸으로 부활한 몸을 느낄 수 있는” 부활의 삶을 미루지 말고 당장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하자고 권한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상봉 기자 –

“이 땅에서 천국도 부활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매우 아름다운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펙트를 놓칠 수가 있다.

진리는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선한 사마리아인 처럼 선한 행위로 세상을 위하거나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게 하는 실천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이 세상에서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처음 창조된 이 세상을 파괴하고, 새 하늘 새 땅이 재창조 되는 때를 위해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이를 ‘영혼 구원’이라고 이를 수 있다. 이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분홍 빛 기대나 희망을 버려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처음 세상은 처음 아담과 같이 둘째 세상과 둘째 아담인 아름다운성 예루살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련 된 허상이요,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굳이 이를 육과 영으로 구별하고, 구약과 신약으로 구별하고, 죄와 사망의 율법과 성령과 은혜의 생명의 법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부활은 내가 사라지는 것은 맞지만, 세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죽이는, 어둠의 세상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빛으로 거듭나게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 삶은 실제로는 죽은 것이다. 즉, 하늘의 관점, 하늘의 영생의 입자에서는 세상 삶이란 죽은 삶이라는 이야기이다.

마치 예수를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눈에 비늘이 끼어 소경과 같이 된 것으로 부활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는 죽은 삶을 살았다.

진리인 예수를 만나지 못한 그는 세상을 뜬 눈으로 산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소경으로 살아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비로소 그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고 산 세상 삶이 실제는 죽은 삶, 즉 비늘로 가려진 눈으로 살았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가 소경인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어둠에서 빛으로의 부활을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부활이란, 세상의 죽은 삶에서 하늘의 살아 있는 삶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삶이 죽은 삶’이라는 하늘의 관점으로 깨닫아 믿는 믿음으로, 세상에서도 하늘의 영생, 즉 진리인 복음을 품고 산다면, 이를 세상에서 부활의 거듭난 삶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다.

부활은 빛으로 어둠을 걷어 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눈에 가려진 비늘을 발견하고, 성령의 인도로 가려진 베일이 벗겨지는 축복이 부활이다.

이를 두고, ‘창조적 파괴’라고나 부르면 어떨까?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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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이제민신부 “우리가 믿는 부활없다”
http://well.hani.co.kr/media/8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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