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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와 믿음, 그 이분법적 사고!

“당신은 겸손합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이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라고.”
– 김성인님 –

ㅎㅎㅎ 하나님을 올리고 내리는 것도 다분히 의지가 작용하기에 행위가 되지요. 그렇다면 바라보는 것도 의도하는 것이기에 행위가 아닐까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성령이 하시는 걸루? 이것도 행위네요. 그렇다면, 나는 몰라? 하는 이것도 행위인가? 참 어렵네요.

똥 마려우면 똥 누고, 배고프면 밥먹고 하는 본능의 일 말고는 모다 인간 의지의 행위가 되겠네요. 마치, 심장이 자율신경으로 박동하듯, 하나님 영과 함께 숨 쉬는 것만이 행위가 아닌 믿음이라고 해야할지? 참 난감합니다.

믿음도 그렇지요. 우리가 믿음이라고 믿는 그 어떤 것도, 절대로 한 가지 정의로 딱 부러지게 정의할 도리가 없는 것은 그것이 인간 수준의 생각과 사고와 논리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의 사건을 설명하는 어떠한 언어의 시도도 결국은 무궁한 하늘의 상황을 좁은 우상이라는 틀에 가두는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인간 예수님으로 강제로 이 땅에 끌어내려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과 같은, 신성을 인성으로 모독하는 것으로 비유 됩니다. 절대로 하늘의 일은 인간의 언어로 묘사되거나 설명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이 하늘의 흉내를 내려는 모든 몸놀림이나 시도가 행위라는 죄에 해당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은 우리가 믿고 싶은 믿음 자체도 행위라는 죄의 카테고리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행위다, 아니다, 하는 시시비비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행위의 범주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성경의 메시지가 있지만, 사실 이 판단이란, 자신에게 스스로 이르는 행위로 인한 죄에 대한 충고인지도 모릅니다.

무한에 가까운 하늘의 언어로 표현해야할 하나님의 뜻을 수 십만개 내지는 수 백만개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언어도단이요,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그 어줍잖은 인간의 언어라는 도구로 신을 논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을 선포하고 떠들어 대는 자체가 행위로 인한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 없이, 주님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설명하고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주님의 따스한 입김과 체온의 온기를 느끼며 성령의 터치를 서로 체험하는 가운데, 잠잠히 성도들 간의 대화를 통한 주님을 증거하는 태도가 우리들 진정한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생애를 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하신 하늘의 비밀에 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긍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오직 성령님이 움직이시는 그날에 비로소 예수님의 비밀의 말씀이 열리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도 영감을 통해서 성령의 존재감을 체험할 뿐이고, 성도 간의 교제와 모임 중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뿐입니다.

오직 성령님 만이 우리를 하늘의 세계로 여행하게 하는 인도자이심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믿음’과 ‘행위’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언어의 틀을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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