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여호수아에게 이른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 8>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용사 여호수아를 비롯한 세상의 어떤 위대한 용사도 지킬 수 없는 명령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사항을 지켜 행하라고 우격삼을 내지르는 하나님은 분명히 병주고 약주는 돌파리 의사든가, 상식적인 눈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불가사의의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심중에 꿰뚫고 계시는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왜 이런 터무니 없는 가르침으로 사랑하는 여호수아를 괴롭히기만 했을까? 과연 그럴까?
여기서 핵심은, 다지켜 행하면 길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하는 세상 복을 준다는 것에 있지 않다. 다음 성경 구절을 연결해 보면, 형통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1: 9>
길이 평탄해지고, 형통하는 것은 세상에 흔한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율법책을 입에 붙이든 말든, 주야로 묵상하든 말든, 주야로 지키든 말든,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인간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인간에게 주시고, 마치 심술맞은 스쿠루지 할아비처럼 인간에게 병주고 약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의 관계를 수행하기 위한 전조극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죄라는 것,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해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 형성을 이루어 가신다. 죄에 무게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즉 구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관계의 중요성은 결국, 성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고, 이는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하기에 죄와 율법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시작을 하신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흘림의 구속하심을 위한, 인간 심판에 대한 지루한 장편 이야기가 바로 구약의 전체 줄거리라 할 수 있겠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율법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구별 되는 한낯 피조물의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에,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행위’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진실을 증명하여 스스로 죄인 임을 고백하게 하시고자 하는 데, 하나님의 깊으신 목적이 있었다.
구약 전 장을 통해서, 누가 더 하나님의 눈에 비추어 기쁨이 되어 부자가 되었고, 족장이 되었고, 선지자가 되었고, 왕이 되었고, 큰 나라를 이룬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키고자 하는 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오직 성자 하나님 예수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맞추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성경 전체의 주제는 근본 하나님이신 그분은 흥해야 하고, 인간인 나는 망해야 하는 존재 임을 확인 시킬 뿐이다. 우리는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었던 세례 요한의 이 진솔한 고백으로 오직 그분에게만 영광을 드려야 하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아야 된다.
토기가 토기를 만든 토기쟁이에게 무슨 의미를 물을건가? 토기가 의문시하는 모든 물음은 다 허무한 질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천국 보좌앞에 정렬한 24 장로가 그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벗어 던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마지막 그 모습이 우리들의 비전이 되도록 우리는 주님 앞에 잠잠히 무릎 꿇고 기도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만이 행위를 벗어난 진정한 믿음이 될 것이다.
“주여, 우리는 무익한 주님의 종이로소이다!”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