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보고 싶은가? 즉시 죽어라!
“신앙이란 무엇인가?” 살아 생전에 매일 죽는 것이다.
살아 있지만 나의 의를 위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를 위해 내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 가신 예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 와 살고 계신 예수님이 사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몸 안에 계신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사셔야 한다.
이는 내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인격으로 표현 되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과 하나 되셔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이 표현되는 것과 같이 나타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예수님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있는가?” 이는 마치 세상 사람들이 던지는 인생의 질문과 동일한 것 같지만 그 동기와 결과는 완전히 구별 되어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이 던지는 철학의 명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이지만, 성도가 가지는 인생의 명제는 “내가 어떻게 죽어야 잘 사는 것인가?” 하는 것과 같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죽어야 산다. 내가 죽지 않는 한, 내 안에 계신 온전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살아서 표현 되지 못한다. 결국 나라는 자아의 존재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나라는 존재란 철저히 죽여야 하는 원수와 같은 대상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바울도 “매일 내가 죽노라!”는 고백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있다. 내 자신이 도둑의 괴수인 것을 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천국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내가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예수님을 내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놓은 채, 내가 주인으로 우상이 되었기에, 주님은 분명히 나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고, 이로 인해 오히려 ‘독사의 자식이고, 무덤에 회칠한 외식하는 바리새 인’이라고 욕하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나 대신에 예수님을 살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내가 죽는 순간, 즉시 예수님은 내 몸에 나타 나신다. 그러니, 신앙인은 이 땅에서 늘 죽고 죽어야만 한다.
내가 죽고 없어 졌으니,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더 이상의 선악과의 판단도, 지옥도 천국도 없다. 오직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만 살아서 내 육을 통로로 사용하실 뿐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이다. 이 상황을 ‘십자가 도’라고 한다.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는 것이 진리의 문을 여는 첫 단추를 끼는 것이 된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가짜요 헛 구원이다.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을 동행하는 확실한 증거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가?” 하는 사실을 확인하고 증인이 되면 된다.
십자가는 죽음의 고통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남겨 놓고 가신 그 십자가를 매일 지고 고통을 감당하라. 그 곳에만 영생의 구원이 있다.
신앙인은 매일 죽지만, 재림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비한 나라의 삶을 산다. 이 땅에서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이 천년 왕국이요, 영원한 구원의 왕국이 되어야, 장차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내려 왔을 때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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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지요. 신앙생활은 정과 육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밖고 죽는 생활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 윤용완님 –
죽는 순간 예수님을 만납니다. 너무 쉽지 않은가요? 이제는 죽는다는 것에 초점을 버리고, 예수님을 만난다는 환희에 초점을 맞출 때입니다. 그리하면 쉽게 나를 부인할 수 있지요.
“매일 죽어야 한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게 이성적으로 시인하고 행동해야 되겠지요. 주님 내 안에 계시옵소서.” – 정윤숙님 –
아멘! 매일이 아니라, 늘 죽어 있어야지요. 그래야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분명 프로필은 공과교수님이신데~^^ 찐한 메세지 감사합니다~♥” – 고승희님 –
영광이지요. 하나님께 감사!!!
“저희 일관도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심가 사심가(死心歌 死心歌)
심능사료쾌락다(心能死了快樂多)
칠규삼시여불사(七竅三尸如不死)
천경만권막여하(千經萬卷莫如何)
사심가 사심가 마음이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칠규삼시가 죽지 않는다면 천경만권을 읽어도 어쩔 수 없네.” – 황수진님 –
아마, 어느 것을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자신을 헌신하는 수양이 필요한 것이고, 최고의 경지가 자신을 산 제사로 바치는 것이겠지요.
다만, 죽이는 작업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다른 관점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헛된 죽음인가? 귀한 죽음인가의 절대 가치가 여기서 결정나는 것이니, 이것 또한 진리에게 물어서 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