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인생이 가지는 허상?
인간을 지성이나 이성이나 감성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먼저, 본능적으로 인간은 감각의 동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갖춘 감각 기관은, 우선 오감이 있고, 이에 더해서 육감을 더해서 여섯기관으로 나타낸다.
오감은 모든 세상 정보의 입력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보들은 각각의 입력 기관에 달린 센스를 통해서 뇌로 전달 되면서 몸에 유익한 정보인지 아닌지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게 된다.
문제는 수 많은 조작된 정보들로 인해서 오감의 입력기관이 제공하는 정보들을 잘못 판단 한다는 데에 있다.
예를들면,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 맛있다고 판단하고 먹는 음식들이 사실은 몸에 무지 해로운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실제 입맛과는 상관없이 몸에 유익한 것은 음식이 가지고 있는 영양소에 달려 있다
육감은 분멍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유익할 것으로 판단하지만, 기실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눈으로 탐스러운 것이나, 몸에는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 같이 비만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온통 미디어 광고판이 다이어트를 위한 저칼로리 식품과 건강식품을 홍보하는 선전으로 도배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느끼는, 모든 감각하는 것들이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감각은 어쩌면 인간의 육체라는 허약한 틀에 맞추어져 잘 설계 된 한낯 로봇의 기능을 지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느 구간의 특정 주파수대 파동의 음을 듣고, 파동의 빛을 보고 그리고 어느 한계 안에 있는 작은 미립자 물질의 맛을 느끼고 피부에 압력으로 전달 되는 것을 실제의 실상으로 여기고 있다.
그만큼 우리들이 가진 감각 기관은 어느 일정한 한계 속에서 벗어난 무한한 입력을 센스할 수 없는 지극히 무기력한 장치라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그 무한대의 가능성에 비추어 보면, 사실은 한 점에 해당하는 한낯 소경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본다하는 것도 어쩌면, 무한대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비하면 허물이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실상이라고 하고 그 오차 범위 안에도 들지 않는 보이는 대상은 그림자와 같은 무시할 수 있는 잡음, 즉 허상이라 해도 과학적으로 그리 틀린 논리는 아니다.
물로, 현재 우리가 사물를 보는 것 조차도 기실은 수천년 전에 어느 행성에서 보내진 허상의 이미지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더욱 지금의 현상이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 육의 본능에 지배 되는 부실한 감각 기관의 초기 입력의 오작동으로 인해서 그 이후에 이어지는 육감이나 이성과 논리적 사고 및 지성과 감성이 온통 가짜를 진짜로 여겨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존감,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같은 하챦은 세상 쓰레기에 소중한 하늘의 생명을 낭비하게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Do not love the world or anything in the world. If anyone loves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The world and its desires pass away, but the man who does the will of God lives forever).” <요한 1서 2: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