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미 평강의 원 위에 놓여있다!
“너의 필요를 위해 신을 의지하지 말고, 신의 필요에 의지하도록 해라!
신이 너에게 힘을 줄 것을 기대하지말고, 신이 너의 힘이 되도록 하라!
너의 관점 위에 서지 말고, 신의 관점 위에 서라! 신의 어깨 위에 서라!”
우리 안에 천국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 안에 천국이 없으면, 우리 안이 지옥이 된다.
우리 안에서 행복이 있기에,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불행도 우리 안에 있다. 이를 흔히 하는 말로, 천국과 행복은 우리들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아마도 우리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믿음’이라는 어려운 용어로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우리 마음이 천국이면, 마음이 평안한 것이고, 이를 평강이라고 부른다. 평강은 천국의 상태이고, 이를 누리는 것은 마지막 구원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부활한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를 만난 다락방에서 처음 하신 말씀이 “평강이 있으라!”는 축원이었다.
유월절에 예수가 십자가 사형을 당한 뒤, 예수를 좃는 무리들은 희망을 접은 채,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불안과 극심한 두려움에 숨어 있는 상황이었다. 천국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빛으로 천국으로 나타나셔서 지옥에 있는 그들을 평강의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제자들은 눈으로 천국을 본 뒤에야, 비로소 천국의 평강을 마음으로 믿고 결국 천국의 평강을 누리게 된다.
여기서 평강은 아무런 거침이나, 막힘이나 경계가 없는 상황을 누리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그 자유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둥글게 돌아가는 원 위에 위치하는 것과 같이 평안하기만 하다.
이 상태에서는 따짐도 분쟁도 아무런 세상 근심 걱정도 없게 된다. 제자들이 그렇게도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이제 바로 눈 앞에 다시 살아 오신 것을 본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 된 기적의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그들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에고가 사라진 그곳,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는 영광의 빛 가운데 머무는 상태다. 이 상태가 평강이 있는 상태다. 무한히 돌아가는 영원한 원 위에 얹혀 있는 형국이다.
이 완성 된 원은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이루어 놓은 영원한 구원의 원이다. 소위,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라는 끝없이 돌아가는 사이클에서 벗어나 해탈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윤회를 마치기 위한 수양이나 노력으로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우리가 원에 머문다고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해탈의 원에 속할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해탈의 입장에서 이 해탈을 바라 봐야 한다. 해탈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윤회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윤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 절대로 해탈에 대한 의미는 있겠지만, 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부처는 해탈의 입장에서 해탈을 바라 볼 수 있었기에 해탈을 경험할 수 있었다. 윤회의 낮은 차원에서 바라 보고자 하는 한, 절대로 해탈은 물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목해야한 것은 만에 하나, 부처가 윤회의 사이클에서 벗어나 해탈 위에 선 것은 부처 자신의 스스로의 노력이나 깨달음에 인한 것이 아니라,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차원 높은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과 평강을 바라보는 한, 이미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관점에서 평강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한, 절대로 이 평강을 경험할 도리가 없다.
부활한 예수가 명령하신 그 평강의 빛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의 능력 안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다.
믿음이란, 마음 먹기나름이라고는 했지만, 이와 함께, 그 믿음이 조건 없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락방의 제자들처럼, 세상 마지막의 심각한 상황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믿음을 확신하는 상황을 필히 경험해야 된다.
믿음이 확신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히브리어의 안다고 하는 뜻이고, 야고보서에서 언급된 ‘행위가 있는 믿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욥의 마지막 주님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 같은 경지(평강의 경지)는 수많은 용광로 속의 뜨거운 고난을 겪고 난 후에 비로소 믿음을 확신하는 행위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평강 안에서는 ‘나’라는 에고의 존재는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다. 내가 없으니, 의심도 희로애락도 사라지고, 오직 천국의 평강만 있다. 더 이상 선택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라는 에고가 사라진다고 할 수 있겠다.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만이 천국을 지배한다. 당신은 이미 평강의 원 위에 놓여있다. 이미 해탈의 경지에서 살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달려 가려는가?
이것이 바로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깨달음의 경지,
신과 합일한 상태, 내지는 신과 연합한 상태에서 얻어지는 은혜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당신을 해탈의 원에서 끌어내릴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당신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 먹기 나름이다.
그것은 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