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칼슈타트!
결국은 루터와 칼빈은 기득권층의 기독교 주류를 이루는 보수파가 된 격이고, 칼슈타트는 소수의 개혁파로 분류 되어 현실에서는 배척과 핍박으로 생을 마칩니다.
세상 장사를 잘한 루터와 칼빈의 기독교는 결국 또 다른 기득 세력의 기독교로 등장해서 타락한 현대 교회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거점을 마련하는 교회는 하늘 교회와는 달리 성공한 것처럼 취급 받는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철저히 개혁 되고 배척 되어야할 생명력이 없는, 쓸모없는 비게덩이가 된 격입니다.
“종교개혁은 지금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중세를 막 벗어난 사람들의 한계가 분명히 있음을 인식한다면 조금은 달리 보이기도 하지요.” – 배경락님 –
그런 것 같습니다.
종교 개혁의 대상이 단순히 수준 낮았던 카톨릭이었기에, 그만큼 현대기독교의 수준으로 판단하는 시야가 확연히 다른 것을 살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개혁을 평가할 때, 구시대적 원조 기독교를 편애해서 루터나 칼빈 같은 기득세력을 비호하고 있는 현대 교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팔이 안으로 굽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참교회 회복에 대한 하나님 뜻임을 신학자와 성직자를 비롯한 지식층들이 솔선수범해서 철저하게 분별해서, 진리를 온 천하에 드러내는 모범을 보여야 야 할 것 입니다.
백번, 종교개혁을 좋아라 기념하지만, 이는 비단 카톨릭을 향한 비판의 화살로만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현대 기독교 교단의 모순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내부의 모순을 향한 스스로의 자아비판과 철저한 회개 운동으로 나아가야할 것으로 생각 되어 집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것은 그들의 잘잘못을 정확하게 살피고 회개하기 위함입니다. 역사로부터 배울 것이 없으면 안되겠지요.
루터나 칼빈이 역사적 상황에서 공권력과 일정 타협한 부분을 지금와서 기득권 세력을 비호하였다고 함은 좀 무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루터나 칼빈은 기득권 세력, 소위 세속 권세의 위험성을 알고 그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지도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던 분들입니다. 시대적 한계가 있긴 하지만요.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나 낙스 같은 사람은 바로 세속 권세에 저항권 사상을 이야기하였던 것은 바로 칼빈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었던 것이지요.
오히려, 현재 칼빈을 내세우는 수구 보수주의가 칼빈의 정신을 왜곡하여 기득권을 옹호하고 보호하는 것이 마치 사명인양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점 크게 회개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다만, 루터와 칼빈은 교황에 반대하는 귀족 세속 권세의 비호를 받는 가운데, 추후 강자의 모습을 칼슈타트와 그외 칼빈의 과도한 경건주의를 펼친 신정주의에 나타난 여러 현상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루터나 칼빈을 이용한 현대 기독 기득권자들의 왜곡은 이 시대의 새로운 기독 운동으로 승화 되어져야 함은 크게 동감하는 바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숙지하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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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종교개혁자, 칼슈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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