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l

신성한 노동에 무슨 이론과 논쟁이 필요한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이론과 생각이 분분하면 아무 것도 잡히는게 없다는 표현이 되겠지요?
투잡은 되고, 안 되고의 문제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이지, 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닌것이지요?

처자식은 딸렸지, 능력은 딸리지, 되는 일도 될 일도 보이지 않는 가혹한 세상 현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또 이론을 제기할 선택이 있습니까?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한가지로 족하지만 못난 범부야 한 가지도 어렵지만 두 가지를 한다면야 쌍수 들고 뛰어가야지요?

입이 원수인데 무슨 한가한 이론들로 분주하신지 참으로 우려되네요.
누구는 육의 능력으로 누구는 혼의 능력으로, 또 누구는 영의 능력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대로 먹고 영위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도 천직이 목수였고, 바울도 사울 시절에 텐트 메이커였지요?
기타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한 세리와 의사직업 등등, 12제자들 중에도 무위도식했다는 기록은 없지 않습니까?

원래, 목사직도 자비량의 능력이 기본으로 갖춰질 때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남 누치 보지 않고 제대로 목회능력이 발휘된다는 진실은 기본입니다.
아니면 처자식 책임 없이 가볍게 살아야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선교사 중에 일부일처는 기본이고 자식도 평균 셋으로 애국을 실천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을 확신하는 분들이겠지요.

현실과 이론의 괴리는 기본입니다. 현실은 현실, 이론은 이론, 하늘나라와 세상과의 분별만큼이나 확실히 분별되어져야 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원잡, 투잡으로 고민할 문제는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영이 잘 될려면 육부터 기본적으로 평안해야겠습니다.

기독교는 공자왈 맹자왈과 같은 종교와 달리 철저히 몸으로 떼우는(십자가 순교를 비롯해서) 치열한 실천 종교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원잡 투잡 논쟁은 유교에 물들은 한국인 목사들이 가지는 한가한 세상 윤리관으로 인한 부작용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떤 종류의 노동이냐, 그리고 몇 가지 노동이냐에 관계 없이 노동은 창조주의 성스러운 창조작업에 참여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선물이자 축복입니다.

♡도천 곽계달♡

ㅡㅡㅡㅡㅡ

“우리 같은 60대 전후의 나이에 이중직은 골로 가는 지름길이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처럼 경험삼아 한 번 해볼 수 있는 버킷 리스트는 더더욱 아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고, 일 안하면 생존이 위협당하기 때문에 할 뿐이다.
아무리 작업의 강도가 약해도 매일 반복되는 일들은, 생체리듬의 역기능으로 인해, 사실상 목숨을 담보로 한다.
(몇일 전 동료 근무자가 전립선 암 진단을 받아 갑자기 퇴사처리됐다)

문득 이중직 논란의 배경이 된, 성/속 이원론에 대해 어거스틴 조상께 되묻고 싶었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가 분류하고 명명한 그러한 지식과 체계의 범주안에 갇힌 자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통섭의 시대, 기독교는 아직도 굳건한 그리스 형이상학 혹은 플라톤 조상과 그의 도움으로 완성된(?) 교리체계를 근거로 이 세상을 둘로 쪼개놓는가 말입니다요.
차라리 그런 차원에서는 헤겔의 변증법보다

중세 쿠자누스의 ‘반대 혹은 대립의 일치’라는 명제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요.

우리는 기필코 분류하고 대립하고 반대하지만, 만유의 하나님에게는 결코 대립과 경계가 없으실 테니까 말이지요.”
-이강혁님-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