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쾌락과 허영의 시대, 인류종말의 시대!
꿀벌은 꽃을 따르기 마련이다. 번식과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의 이치라 부른다. 이성끼리 극이 다른 자석처럼 서로 당기는 것도 꽃과 꿀벌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인류의 번성을 위한 지극히 평범한 자구책이다. 여기서 남성은 벌이고 여성은 벌을 유혹하는 꽃에 비유된다.
꿀벌은 단지 생존을 위한 먹거리인 꿀을 바라지만 꽃은 번식과 열매를 맺기 위한 그야말로 생명탄생이라는 신성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지고의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먹거리 꿀과 생명탄생 사업, 이 모두가 그들에게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꿀벌은 꽃의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꽃에는 얼굴이 없을까? 꽃에도 나름대로의 얼굴은 있을 것이다. 세상에 같은 꽃이 없는 것은 꽃마다 다른 이름과 개성이 있다는 싸인이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 보자. 남성은 당연히 여성에게 정자를 점지해서 자식을 낳게 한다. 그런데 꽃에 해당하는 여성은 꿀대신에 무엇을 줄까? 그것은 꿀보다 더 댤콤한 쾌락과 유혹이라는 마약을 제공한다.
아주 원시 옛적에는 꿀벌과 같이 여자의 이름이나 낯을 가리지 않고 남성은 여성을 마구잡이로 사냥했다. 그러나 후에는 양심이라는 도덕의 잣대로, 그리고 전통과 관습의 법으로 여성의 이름을 달리해서 대하도록 했다.
그렇다고 남성에게 있는 꿀벌의 사냥 본능을 어찌 하루 아침에 벗어날 수 있을까? 법과 양심이라는 짜여진 틀 밖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사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남성들의 행각이었다. 이제 시대는 많이 달라졌다. 남성상이 여성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역전의 시대다.
남성 사냥 본능은 ‘마초본능’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 열등인자로 분류되었고 성희롱의 희생물로 전락했다. 자유를 구가하고픈 꽃이 열매 맺기를 숙명으로 여기지 않고 꿀의 공급을 조절하면서 꿀벌의 출입을 막아선 것이다. 그전에 남성의 특권으로만 여겨졌던 쾌락의 유희가 이제는 조건부로 전락하게 되면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가 남성상을 쇄락하게하는 근거가 되었다.
능력 없는 꿀벌은 꿀은 커녕 꽃의 향기도 맡지 못하는 것처럼 능력 없는 남성들의 처지가 꼴사납게 된 셈이다. 일일이 여성의 이름을 불러 구걸해야 하는 빈한한 처지에 몰린 남성은 여성에게 정자 대신에 여성의 허영을 만족시키는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바뀌는 이 시대의 이기적 인간상의 모습이다. 생존과 쾌락과 허영이 지배하는 시대에 더 이상 자연의 이치는 무시되기 마련이고 머지 않은 미래, 인공지능이 극성을 떨 즈음에, 인류종말의 시대로 돌입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생존과 쾌락과 허영의 시대, 인류종말의 시대를 앞당긴다.
♡도천 곽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