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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낸 신에 대한 논쟁!

재미 있네요.

신의 존재 유무는 서로 논쟁으로 해결할 성질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삼는다면 의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의 유무를 신을 부인하는 분들께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논쟁을 시도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논쟁의 의미를 잃게 만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직,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예배로 하나님을 증명할 뿐입니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도, 과연, 과학이 어떻게 영의 존재 유무를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공평한 논쟁을 보장할 수 있을겁니다.

​세상 육과 하늘 영의 싸움이기에 어쩌면 차원이 서로 다른 논쟁에서 합의점을 찾기는 불가능할 것같기도 합니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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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만들어낸 신’이라고 하는데요?

​A : 창세기는 신(神)이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무신론자인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현행 인류)가 가상의 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그는 ‘환상으로서의 신’을 주장했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1856~1939)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은 유아기의 소망(유아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를 채워줄 아빠가 존재하기를 바란다)으로 보호자와 위로자의 역할을 하는 가짜 신을 만들어냈다. 하라리도 전능한 유일신이 세계를 지배하며 선행을 보상하고 죄를 처벌한다는 믿음은 유아기적 소망이 빚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 강제적인 통치를 목적으로 신과 종교를 활용한다고 봤다. 앞서 “인간에게는 영혼과 자유의지가 없다”고 했던 하라리의 ‘가짜 신’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 검토해보자.

​하나님의 임재 경험한 성경 속 인물들

​하라리의 주장과 반대로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일까. 하라리는 불교에 호의적이며, 다신론에도 긍정적이다. 하지만 유독 유일신 사상을 지닌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변화된 사람들은 많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1902~1994)는 반증의 원리를 과학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그는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주장은 하얗지 않은 백조 한 마리를 발견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부정된다고 말한다.

​성경 속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청년시절 이단 마니교에 빠졌던 초기 기독교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로마서를 읽고 변화됐다.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면 최소한 ‘신이 없다’는 주장은 넌센스가 된다.

​과학적 낙관주의, 무신론 근거 안 돼

둘째, 하라리는 과학이 신을 대신할 것이라는 과학적 낙관주의를 토대로 무신론을 내세운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사람들은 전염병을 신의 징벌로 여겼지만 지금은 생물학적 바이러스와 연관된 문제임이 밝혀졌으므로 처음부터 진노하는 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과 바이러스의 역학 관계가 증명됐다는 사실로부터 ‘신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건 무리다. 무신론 과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과학적 낙관주의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가령 스티븐 호킹 박사는 과학적 비관주의를 표명한 적도 있다.

​호킹 박사는 과학 발전이 필연적으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를 가져오며, 인공지능의 발전은 장차 인류의 존속에 해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핵실험에 참여했던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핵무기가 통제되지 않는다면 현 인류는 핵무기로 멸망할 수 있는 첫 세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편리함을 주지만 완전한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돈과 국가, 창조주와 같은 범주 아냐

셋째, 하라리는 인류가 사회를 지배하고 유지하기 위해 돈과 제국, 그리고 허구적인 신의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그런데 돈과 제국은 사회적 합의로 그 쓰임새와 효력이 발생한다. 화폐는 가치가 변하기도 하고 국가(제국)는 흥망성쇠를 겪는다. 자국의 국민을 노예화하거나 영토를 병합할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의 주권은 제한당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돈과 국가는 계약의 산물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역사의 주관자다. 하라리는 돈과 국가를 창조주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범주 착각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하라리는 또 종교가 인류를 강제적으로 통일시키는 매개체로 본다. 그에게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강제하고 통치하는 수단일 뿐이다. 베다 경전의 권위로 카스트 제도를 정당화하는 힌두교나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도 그들의 종교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한다. 고대의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같은 강대국들이 통치자를 신격화하며 종교를 지배 수단으로 사용해 왔기에 그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불의한 기존 체제 유지를 거부했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시의 지배권력과 맞서 회개와 개혁을 외치다가 핍박을 받았다. 아모스 선지자는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꿈꿨다(암 5:24). 영국의 기독교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기에 18세기 영국의 노예 제도를 죄악으로 봤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타락한 마음이 무신론 지배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하라리의 주장은 정당한 근거가 없다. ‘종교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주장 또한 성경과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나왔기에 기독교에 적용할 수 없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진실성을 설명할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타락한 마음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증거를 외면하고 믿지 않을 뿐이다. “어리석고 마음이 부패한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시 14:1) 오래전 시편 기자는 이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했다.”

-김기호 한동대 교수·기독교변증가, 국민일보 2023년 7월 20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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