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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가 무엇이관대?

성경에서는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그 가르침으로 인해서인지는 몰라도 많은 선교사들이 지구촌 곳곳으로 뛰어 달려나가고 있다. 

그 영향 덕택인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의 세계화는 정부가 들인 노력에 비해서는 택도 없는 싼값으로 급속한 속도로 이루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세상 땅끝이란 게 어디를 의미하는가?하는 재미나는 이야기도 있다.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는 유럽의 서쪽에 있는 대서양 연안인 지금의 스페인을 뜻한다고도 해석을 하지만, 지구가 등글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 지금의 해석으로서는 세상 땅끝은 분명히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세상 땅 끝이라는 의미는 영적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진리에 대한 영적 깨달음’이라는 정의를 내려 본다. 각설하고, 오늘 아침에는 그동안 뜸했던 손기철 장로의 행각에 대한 교계의 새로운 반응을 접했다. 

당연히 이단시하는 눈길을 의식하였기에 이에 대한 댓글을 달아 보았다:

그렇다고, 진리를 접한 사람들이 대중을 떠나, 산에서 기도만 할 수도 없는 것이 또한 역설적인 이면이 아니겠습니까? 허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기도 하지요. 세상에 살자니 영이 울고, 하늘에 살자니 육이 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선각자랍시고 산에서 내려 오면, 노숙자 신세가 아니면, 신학이나 교회종파라는 세상 제도적 틀에 빠져야 하니, 이 또한 신앙의 딜레마가 될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니, 손기철 장로와 같은 분들은 모두가 그 현실의 부조리 사이 틈에서 갈등하고, 생각하는 선각자들의 고상한 선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중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불가분의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니 그런 분에게 이러쿵, 저러쿵, 세상 교다늬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직도 현실의 틀에 머물면서 선의의 아름다운 고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행복하지만 어린 신앙관들이지요.

손장로에게 하는 그러한 판단은 창세 이전부터, 이래로 지금까지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부분이기에 늘 부분에게 집착하고 시간과 공간이 변하게 되는 한, 변하게 마련입니다.

변한다는 의미는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결국은 옳지 않다는 의미가 됩니다. 옳지 않다는 의미는 과녁에 빗나간 화실에 비유되는 죄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틀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외에는 판단하고 정죄할 수가 없다는 성경 말씀이 진리입니다.

손장로는 손장로에게 맡겨진 부분적인 역할만 할 뿐입니다. 과연 누가 부분에 지나지 않는 불쌍한 그분을 향해 손가락 질을 할 수 있읍니까? 헛된 일이지요. 

오히려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요? 만에 하나 그분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찾는 것이 우리들의 작은 정성이 아닐까요.

정말 세상이 악합니다. 그만큼 종말의 시간이 촉박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차한 삶이 아니라, 단순한 죽음을 고민해야할 시간이기도 하지요. 

한가하게 주위를 더듬을 시간이 없습니다. 생각의 속도로 변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는 영적 세계가 도래하고 있음을 예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 안에서, 협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겠습니까?

님은 필자의 주장하는 것이 모든 종파를 인정하는 식이라고 하셨는데, 님이 주장하시는 모든 종파는 누가 만든거지요?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와 인정하는 판단은 부분일 수 밖에 없다고 했으니, 인간이 하는 모든 결과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종파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인정한다는 겁니다.

손장로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만 인정합니다. 그러니 손장로 자체는 부분인 것으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거지요. 손장로가 드리는 하나님 영광만 인정하면 되지, 그 외에 손장로의 일거수 일수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데, 감히 무어를 내가 인정하고, 또 안 하고의 주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고자 시도한다면, 그것은 선악을 구별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 응재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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