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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란 조절해야할 대상만이 아니다!

“미국의 분노전문가 매튜 맥케이는 ‘나는 억울한 피해자야!’ 바로 그것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생각”이라고 말한다. 어렸을때부터 부모로부터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으며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습관을 배웠다면 분노를 잘 조절하는 성인으로 자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제게 맡겨진 자녀들을 올바로 키우는 일인 것 같습니다.” ㅡ박유혜님ㅡ

분노를 조절해야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분노 전문가로서의 소견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전문가란, 분노를 문제라는 관점으로 보는 과오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란 조절해야할 대상이전에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분노가 없는 인간? 상상을 할 수가 없지요. 그것은 인간이기를 거절하는 어떤 우스운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노란 인간이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분노란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 느끼고 극복해야 하는 필요한 자양분이라는 이야기 이지요.

분노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도를 지나치는 불행한 사건이 유발 된 것입니다. 한번 분노를 잘못 정의하게 되면, 두려움에 잡히게 되고,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악한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분노 전문가의 잘못된 정의로 인해서 분노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분노와 억울함을 통해서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마치 분노가 사회악인 것처럼 정의하고 분노를 제거해야할 두려움의 대상으로 정의하는 한, 분노가 우리 안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비정상인으로 사회가 채워지게 될 겁니다.

분노가 없어지는 한, 지구인이 아니라, 화성이나 금성인이 되는 거지요. 천국인이라면 좋겠지요. 분노는 자연스럽게 다스려야하는 겁니다. 분노란 산소와 물과 같이 참 인간에게 필요한 필수 요건이기 때문입니다.

분노로 부터 도망가려 하든가, 미워하지 말고, 당신의 애견처럼 곁에두고, 사랑하면서 잘 길들이세요. 

사실, 분을 자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화 승리의 주요한 부분이요, 자랑의 하나입니다. 분은 두 가지 이지요. 분을 내는 것과 분을 참는 것입니다. 분을 참는다는 의미에서는 마음으로 삭이면서 인내하는 것이겠지요.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에 분을 참는다는 것은 또 다른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내면에 난 상처가 축적 되었을 때에 인류 역사상 수 많은 부작용을 낳았지요. 결국 인내할 수 있는 온유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을 내되, 하루 해가 지기 전에 풀어라는 성경말씀도 있지요. 심리적으로도 화를 참는 것이 더 몸에 나쁘다 하는 통계가 있지요. 화는 내되, 화에 사로 잡히지는 말아야 된다는 가르침이 더 유효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절대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 같이 “인간은 태생적으로 분노를 참을 도리가 없다”라는 인간에 대한 근본 정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랍니다. 성경의 십계명이 사람이 지킬 수 없음을 가르치는 반면교사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분노를 참을 수 있고, 참아야 된다는 주장은 어린 아이도 알고 있는 당연지사의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펙트는 이것이 인간의 교만함에서 나오는 잘못 된 생각임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분노로 인한 살인은 육적인 살인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극히 일부분의 그야말로 드문 사건에 해당한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분노를 참으면서 얼마나 많은 살인을 마음으로 자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응재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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