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society

성소수자들에게 향하는 우리들의 자세?

아래에 인용한 내용은 어느 성직자가 포스팅한 글입니다. 매우 심층적인 성서의 내용을 분석하고 나열하고 있는 재미나는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나 지위나 종교계에서 강요한 섹스에 대한 관점, 또한 예수님이 섹스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침이 없었다는 점 등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세상에 대한 2가지 극명한 자세, 즉 긍휼과 은혜로 인한 무한한 용서와 절대적 환멸과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도 좋은 의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의 진실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관한 해석도 사회의 기득권자들에 의해 임의로 해석되어서 사회적 약자들이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 된 바도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에 가서는 징계와 심판에 대해서는 살짝 언급을 피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전자의 면만 들어서 성소수자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끌어 갔다는 사실은 전혀 앞뒤의 문맥이 맞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성소수자를 보호하고 더 나아가 성소주자들을 예수 사랑의 마음으로 도리어 지지해야 한다는 의도적인 결론으로 귀결을 내린 정황이 보입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당연히 예수가 가르치신 사랑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어느 부유한 유대 청년이 예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사랑해야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그 때,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일화를 들어서 그 이웃은 강도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고 생명을 살린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 자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 외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며 살고 있는 모든 세상 사람들, 즉 우리들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 같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오직 진리로 오신 예수 한 분 만이 선한 자요,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끝까지 사랑해야할 선한 사아리아인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웃이란, 결국 우리들 각 자 안에 들어와 성전을 세우시고 주인으로 계신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사랑해야 되는 대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의 대상은 창녀도 아니요, 더더구나 성소수자들의 인격도 아닙니다. 불쌍한 그들의 구원받지 못할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하신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소수자들 각 자가 마음에 담고 주인으로 여기고 추종하는 ‘그들이 아닌 그들’, 즉 악령에 대해서는 진노의 자식이라고 부르시면서 단호한 심판을 하십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세상 교훈처럼, 예수님의 진로하심은 성소수자들이 분별 없이 섬기고 있는 우상 중에 우상인 사탄의 영이지 무지한 성소수자들의 불쌍한 영혼은 구원 받아야할 대상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할 것은, 사회악으로 여겨지는 창녀나 세리나 성소수자들 모두가 사회의 지탄을 받을지언정, 결코 영혼 구원 사업에서는 제외 되어야 한다거나 지탄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사회적 보호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들이 섬기고 있는 악한 영인 사탄은 철저히 분리되어 진노와 환멸의 대상으로 여겨져야 하겠지요.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라는 가르침을 잊어서, 하릴 없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바보야, 육이 아니라, 영이 문제야!”

♡ 응재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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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비정상’ 적 결혼 양태인 ‘일부다처제’가 ‘정상’으로 등장한다. 또한 무수한 ‘첩’들을 지닌 남성들의 결혼생활이 매우 ‘정상’적인 것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성서의 이야기들을 보면 딸/아내/첩의 역할속에 있는 여성들은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로서 손님들에게 환대의 의미로 내어줄 수도 있다. 여성은 ‘살아있는 죽은자 (living dead)’ 로 간주되면서 집단성폭행의 대상으로 ‘사용’되고 있는 창세기 19장이나 사사기 19장을 보라. 

성서는 또한 여성들은 공적 자리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거나 물음을 물을 수 없다고 하면서, 질문이 있으면 사적 공간인 집에서 남편에게 조용히 물어야 한다고 한다. 유명한 바울의 텍스트들이다. 성서를 따른다며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이들이, 과연 이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딸/아내/며느리 등을 집단성폭행의 대상으로 다른 남성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가. 성서학자인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은 ‘테러의 텍스트 (Texts of Terror)’라는 자신의 책에서 성서의 특정한 구절들이 얼마나 다층적인 ‘테러’들을 여성들에게 가하고 있는가를 면밀히 분석한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이러한 ‘정상-비정상’의 레토릭을 인류의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양산해왔다. 이러한 ‘정상화(normalization)’ 또는 ‘규범화(normativization)’가 목적하는 것은 현상유지적 권력의 확고화이다. 한때 교회는 ‘자위(masturbation)’를 하거나 또는 결혼한 부부라도 성적 관계중 ‘쾌락’을 느꼈다면 교회에서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죄’로 규정한 때도 있었다. 

부부간의 성적 관계는 성적 쾌락이 아닌, 생산(reproduction/ procreation)의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정상적 성’ 관계였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가 우리에게 준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이러한 ‘정상화 (normalization)’의 과정이 어떻게 종교적, 사회정치적 통제 권력을 구성하고 유지하게 하는 가에 대한 분석이다. 한 사회에서 어떠한 특정한 존재 방식을 지닌 이들이나 그들의 행위를 ‘정상’ 또는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회에서 권력을 지닌 그룹이다.

성서는 한 사람에 의하여 쓰여진 ‘단일한 문서’가 아니다. 성서의 텍스트들은 다양한 역사문화적 또는 사회정치적 정황에서 쓰였다는 사실은 성서 안에서 상충하는 레토릭을 찾을 수 있다는 것과 연계된다. 성서에는 자신과 상이성을 지닌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의 가르침도 있고, 그 ‘다름’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노골적 적대와 혐오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예수’를 자신들의 종교생활에 가장 중요한 ‘중심’으로 간주하는 ‘기독인 (Christian)’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는 인간의 섹슈알리티의 다양한 양태에 대하여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무조건적 환대, 연민, 사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혐오를 단호히 넘어서야 할 것이다.

한국의 퀴어 퍼레이드에서 ‘성서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 하고자 하는 ‘예수 믿는 이들’은, 정작 예수는 혐오가 아닌 포용과 사랑을 가르쳤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기억해야 해야 한다. 

그래서 성소수자 혐오를 위하여 쓰는 시간과 에너지를, ‘혐오 저지 운동’과 ‘소수자와의 연대운동’ 으로 단호히 전환하기 바란다.(강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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