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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니이체 단상!

같은 내용의 교훈을 접한다 해도, 무언가 달라도 한참 다르게 다가오는 야시꾸레함이 있는 것이 유대인들의 남다른 향기다. 어찌, 평범한 교훈일진데, 이렇게도 남다르게 독특한 향기를 풍미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유대인은 영이라는 깊은 우물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물을 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영이라는 기준을 설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육과 혼으로만 써 내려 가는 교훈은 사실 조금만 파내려 가면, 그게 그것인, 별 다른 감동을 자아내게 하지 못한다. 반면에 영이라는 높은 차원을 지고의 가치와 비전으로 삼아서 나아갈 때에는 세상적으로는 비타협적이고, 융통성 없는 것처럼 보여도 지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맺는 열매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고도 달다.

겉보기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하늘이 같은 수준의 행복과 성취감으로 보인다 할 지라도, 그 속은 하늘과 땅 차이로 차원이 다른 결과를 나타낸다. 사실, 세상에 내노라하는 어떤 멋있는 결과물도 영이 없는 세상 작품은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지 못한, 영원히 마무리 점을 찍지 못한 채 날지 못하는, 한낱 개천의 용의 존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창시한 유다가 세상을 풍미하는 세상 이름이라면,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화룡점정한 뒤 얻은 이름인 이스라엘은 하늘의 이름이 아닌가. 사람의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세상에서 하늘의 차원으로 격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격이 신격으로 승화 되었다는 의미이고, 그 매개체는 하나님의 영이 개입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유다가 아무리 세상 우물을 잘 팠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스라엘이 파는 하늘의 우물과는 비교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과 비교 될 수 없는 심오한 이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신은 죽었다!” 고 선언한 허무주의의 대부 니이체는 어떻게 보면, 신에 종속 되었던 중세 시대의 신본주의 사상을 정면으로 부인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사실은 그가 신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신을 빙자로 해서 잃어버렸다고 생각된 인간성의 본질, 즉 인간의 진정한 가치추구의 대상인 자유사상을 고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져 본다.

그 극단적인 방법이 신의 존재, 즉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지고의 이상과 비전의 대상을 제거한 신의 존재를 부인한, 오로지 인간 스스로의 존재로 가치를 창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신이 없다는 전제 하에 과연 인간은 스스로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하고 또 그 결과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게 바로 허무주의자 니이체가 바라는 바, 신에 종속되는 비인간적인 허구 부분을 제거한, 순수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모습, 즉 인간 공화국’을 선포해 본 것이다.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이로서 파생되는 결과는 어떠한가? 니이체는 이를 위해서, 신이 없는 인간 세상 삶을 온통 희망이라고는 눈꼽 만치도 없는 허무한 고행의 길이라고 정의를 하는 것 같다. 이러한 허무가 차지하고 있는 세상을 어떻게 인간이 적응하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로다. 그는 이 세상 고행의 무거운 짐을 중력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중력으로 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모습을 숭고한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등에 날개를 다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바른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 허무한 세상 삶에 날개를 달기 위해서는 비록 세상이 고해이고, 그대를 속일지라도 자신은 스스로 긍정하면서 매일의 삶이 축제가 되도록 춤을 춰야 한다는 것이다. 

중력을 거슬러서 춤을 춘다는 의미는 인간의 영혼을 담는 육체를 잘 다듬어서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오직 치열하게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이론이다. 역설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몸을 예술의 경지로 다듬어야하며, 이를 통해서 허무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철저하게 긍정하면서 매일 축제의 춤을 춰야한다는 의연한 결심이 뒷바침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허무주의 이론이 기실은 자유하는 인간상을 추구하기 위한 것으로 사실 신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신에 종속 된 피조물로서의 열등한 부분을 제거함으로 해서 단순화 된 인간성이라는 방정식 해를 추리해서 풀어본 것이 아니겠는가? “신과 하나 됨으로 해서 진정으로 인간성이 자유할 수 있다”는 정답을 애써 부인함으로 해서 허무주의자 니이체가 얻은 결과 해는 가설 무대 위에서 춤추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모습을 한 인간일 뿐이다 하는 역설적인 해를 얻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인 인간 존재를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 나르시즘으로 예술화 된 인간 육의 모습으로 새롭게 분장 시킨다고 해서 진정한 인간성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니이체 가설 덕분으로, 인간성의 한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인간의 욕망 덩어리로만 비하 되었던 인간 육의 한계를 예술이라는 높은 경지의 숭고한 차원으로 승화시켜서 육을 재해석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응재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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