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리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성!
오늘은 “죽음이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영어로 교제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발명품’이라고 스티브 쟙스가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정의했지요. 죽음이 없으면 삶의 변화가 없어서 안주하게 되면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없어져서 삶의 가치가 유명무실 하게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국가나 기업이나 개인이 비대해져서 변화가 불가할 때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인생은 파도와 같이 내림이 있으면 오름이 있고, 오름이 있으면 또한 내림이 있는 거지요. 파도로 인해서 바다가 썩지 않는 것처럼, 삶도 또한 죽음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로 인해서 새롭게 거듭나는 거지요.
달과 지구의 중력에 의해서 지구에 파도가 생기듯이, 인생의 삶과 죽음 또한 하늘과 땅의 중력 관계에 이끌려 생성 되는 것이지요.
‘인생은 정리’라고 합니다. 삶을 정리하는 가장 큰 요소는 죽음이 아닐까요? 무릇 세상의 생노병사나 생사화복의 변화는 나름대로는 인생을 가볍게 정리하게 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소중한 요소라고 하겠지요.
죽음은 위대한 삶을 지탱하는 근본 힘입니다. 죽음에 감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의인이기도 하지만, 우리 같은 범부들도 세상에 유익한 존재인 것은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조용히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라지는 것이야 말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켜야할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각 자는 싫든 좋든 피할 수 없는 죽음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류에 이바지하고 있는 셈이랍니다.
그럼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를 한자로 표시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가르치는 모임’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에크레시아, 이것은 ‘시민의 집회 또는 민회’라고 하는 데, 그 어원은 ‘밖으로 불러냄’, 즉 세상 밖으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세상과 구별된 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어로는 영어의 처치(church), 프랑스어의 에글리즈(église), 독일어의 키르헤(Kirche) 등이 교회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말들은 그리스어의 키리아케(Kyriake: 주님에게 속한다는 뜻의 말)에서 나왔다.
그리스도 교회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설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나라’에 불러모으고 제자 중에서 이스라엘 12지파(支派)를 상징하는 12사도(使徒)를 선택, 그들의 주위에 사도와 제자들의 집단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집단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소외된 자들’의 소수의 무리였다.
이것이 온세상에 퍼진 복음의 씨였고, 여기에서 교회가 싹터나온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 공동체에 성령을 보내어 하느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하고 거룩하게 함으로써 만인을 구원하는 기관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공동체인 동시에 지상에 설립된 집단이라는 사회적 조직이므로, 신적(神的) 요소와 인간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두 요소가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고 있는데, 사회적 기구는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의 성장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며, 교회를 살리는 성령(聖靈)을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나 별 차이가 없지만, 인간적인 요소를 이루는 여러 가지 세부사항에 이르러서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가톨릭의 신앙에 따르면, 조직된 사회로서의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과 사도단의 후계자인 주교들에 의하여 다스려진다. 교회의 이러한 직분(職分)은 형제들에게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사람들이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자유로운 협력 속에서 구원되도록 하는 데에 그 사명이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이러한 위계제도(位階制度)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가 빈곤과 박해 속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役事)를 이룬 것과 같이, 교회도 구원의 성과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 속에 죄인을 품고 있기 때문에 성스러우면서도 늘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세상 종말에 이르기까지 주(主)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 두산백과 –
일반적으로 처치라고 하는 현대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는 데 있어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그리스도 예수의 표징으로서, 부득이하게도 교회란 세상 조직을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내에서도 군대나 대기업에서 사용하는 톱다운 방식의 조직문화를 상설화 해서 위궤질서를 내세우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창조 질서를 대변하는 듯한, 교회 내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위로는 성직자와 장로의 직분이 있고, 또 아래로는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분화 된 교회 조직의 운영을 필수 사항으로 여기고 있다. 과연 교회가 세상 기업과 같이 효율이라는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 타당한 일인가?
대기업의 조직 문화라는 것도 사실은 유행과 같아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변화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교회도 과연 이런 식으로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 변화 발전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니다”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경우에 현대교회란 결국 기타 다른 종교 단체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세상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과 신성으로 하나가 되어 있지만, 궁극적인 것은 신성으로 하나되어 연합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절대로 인성이 궁극적인 존재로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란, 헬라어의 근원에서 그 본질을 찾아야 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구별 되어 부름 받은 자들의 만남과 교통에서 그 본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함으로 복음을 깨달은 자들의 특별한 만남에서 교회의 본질이 형성 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성령과 함께 짝한 자가 교회의 원자적 역할을 할 것이고, 두 사람의 만남에서 교회라는 분자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함 속에서는 어떠한 탑다운 방식의 상명하달식의 조직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성도들의 수평적 교제와 맡은 역할의 신실하고 자발적인 봉사가 있을 뿐이다. 십자가의 상하 관계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와 성도 간의 관계만 있고, 모든 성도들 간의 관계는 수평 구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은혜의 시대와 더불어 종말의 이 시대에서는 집단지성이라는 새로운 수평 문화가 형성 되면서, 에크레시아의 본질에 더욱 가까운 교회 문화를 경험하고 있다. 모든 구성원들이 이 시대의 문화 창조에 참여하듯, 이제 교회라는 본질에 충실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만남과 교통의 시대를 기원해 본다.
♡ 응재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