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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현상과 천국 복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우주는 자연 법칙을 따라서 흐른다. 그리고 세상 공권력도 그 정한 룰대로 흘러간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연과 사회는 그 짜여진 틀 안에서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벗어 나지 않는다. 벗어 날 때에 우리는 자연재난이라고 하고 또 사회 공권력이 무너졌다하고 난리를 피운다.

그래서 곧 잘 자연과 세상을 후르는 물에 비유한다.

가끔은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흘러 갈 때가 있다.

주일 아침에 만날 약속이 있어서 부랴부랴 뛰어 내려 오는 데, 운이 없는 건지 본인의 입장에 아랑곳 하지 않고 바로 눈 앞에서 버스가 정차도 않고 지나쳐 버렸다. 순간 조급한 마음에 버스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어디에다 하소연 할 데도 없다. 

누구는 이때 화풀이로 혈기를 부리기도 할 만하지만, 잠시 분을 내리고 나를 되돌아 보았다. 버스가 지나간 것은 나의 바쁜 시간표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버스 나름대로의 길을 재촉할 뿐이다. 시간에 맞추면 타는 것이고 못 맞추면 못 타는 것뿐이다.

자연 현상도 마찬가지다.

예를들어 일기예보에 관심을 가지고, 주말에 산행도 정하고 테니스도 준비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것을 우리는 현상 이라고 부른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현상을 예측하고 현상에 대비해서 지혜롭게 살아야하는 존재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질도 결정나고, 대응하는 자세에 따라서 인격이 결정된다. 즉 현상에 반응하는 태도가 인격이라는 격으로 결정된다. 현상을 현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현상을 마음대로 부릴려고 하니, 자연, 성질도 부리고 운수를 탓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현상을 보고 준비하고 순응하는 자세가 우리들의  인격으로 형성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영적인 문제를 자연과 세상 현상에 연계해서, 영적 인격을 비하시킨다는 사실이다. 현상을 현상대로 받아 드리지 못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상을 영적 복이나 저주로 연계 시켜서 자기 중심적인 종교적 행위로 주장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에 상관없이 버스는 정한 시간에 떠나간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버스가 떠난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 뜻을 들먹이고 절망한다면, 하나님인들 무슨 낙으로 인격도 없는 허무한 자녀들을 키우겠는가?

우리는 이 땅에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엄밀히 이야기 하면, 죽기 위해 온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루어지지 못한 현상에 대해서 왈가 왈부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현상을 포용하고, 현상을 초월해서 살고자 이 땅에 온 것이다.

초월한다고 해서 예수님처럼 하나님 영광을 위해 기적을 목적으로 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 사회현상에 충실하면서, 천국의 복음과 섬김과 헌신으로 자기 부인과 예수님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 지는 겸손한 자세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니이까?”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는가? 대답하되, 가이사 것이 니이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니.” <누가복음 20: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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