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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부인하고 죽는 사람?

성경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들의 육체와 정신을 더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혹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못박히는 고통을 재현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성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의 모습이 자신을 부인하기 위한 조건으로 오늘 날의 신앙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마음판에 새겨 자랑으로 여기며 고이 간직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 자신이 거룩해져서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시간에도 콜링 받았다는 자부심으로 온 세상 끝으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선교사 직분을 능히 감당하고자 몸부림 치며 달려가는 사람들도 부지기 수에 이르고 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대부분의 거룩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에게는 선교라는 대명제 외에도 부부 문제나 자녀들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들에게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이웃에게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살면서 빛으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데, 실제 그들의 삶을 세상 관점으로 바라 보더라도 세상의 모범이 되거나 거룩한 가정은 커녕 평균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성화의 노력을 그쳐야 하는가? 성화의 모습을 추구해야하는 것을 그치고 나면, 무엇으로 세상과 분별해야 하겠는가? 그렇다. 성도들이나 선교사들이나 전도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스스로 거룩하고자 하는 세상 체면이나 지키고자하는 어리석은 자세는 송두리채 물리쳐야 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물리쳐 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성화는 현대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행위나 체면이나 사회 관습이나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윤리나 전통의 기준에 맞추야하는 높은 수준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바로 선악과를 범한 죄인인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지나지 않거나, 또 다른 세상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세우는 인본적인 바벨탑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실천 하고자 하는 성화란 무엇인가? 성화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고, 날마다 죽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닌 나를 버리고 참 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참 나를 회복하는 것인가?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서 피조물인 나라는 존재를 분명히 정의하는 것이고 이 진실을 겸손히 받아 들이는 것이다. 

다행히 피조물에게도 일정 부분 권리가 있다면 창조주의 뜻을 깨닫는 것이고, 그 뜻대로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다. 이 모든 진실을 벗어난 현상을 죄라 하고 죄인의 행위를 교만이라고 정의한다. 피조물이라는 존재를 깨닫고 인정한 다음에 자연스레 거치는 다음 과정이 피조물이 가져야 하는 자세다. 

그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 데, 첫째는 창조주 앞에서는 나의 존재 가치를 철저히 부아하는 것이다. “I am nothing. I am nobody.” 의 의미를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The Providence)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Grace)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이 깨달음 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성도의 삶이요, 소위 직분 있는 사람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

물론, 삶의 각박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 깨달음의 믿음이 잠시 흔들릴 때도 있고, 비록 배도도 해야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 깨달음이 있는 한, 어떤 상황과 행위에서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기준 선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인지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성화의 의미라고 하겠다. 

이 성화의 작은 깨달음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이지는 것이기에 우리의 자랑이 될 수가 없다. 존재하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기 때문이지, 우리 피조물이 스스로 받을 영광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오직 예수가 못밖히신 십자가 밖에는 없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의 역사이고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나를 부인하는 것이요, 날마다 죽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을 보장 받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선교와 전도의 시작이요 끝이라 하겠다. 

이것을 깨닫는 자는 빛으로 되고 그 빛으로 선교와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선교와 전도는 선교사가 아니라, 전도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깨달음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깨달음이란 어둠에 빛을 밝히는 창조작업이 아닐 수 없고, 이 창조야 말로 선교요, 또한 전도라 아니할 수가 없다. 무지를 알게 하고 교만을 밝혀서 통회하는 마음, 가난한 심령을 가지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요, 전도라 하겠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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