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廣野)에서, 다시 어린아이로 태어난다!
‘진리(眞理)가 하나’라는 의미는 영구불변(永久不變)이라는 의미 외에, 세상의 잡다한 모든 이론들을 하나로 묶어서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으로 간단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진리가 모든 만물의 근본을 이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진리는 구차하게 변명 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며 태양과 같이 빛을 발한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했을 때에, 이는 진리의 이러한 속성(屬性)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고, 이러한 실천력은 순전히 ‘믿음’으로 부터 나온다. 여기서 믿음이라고 함은 보이지 않는 근본의 힘을 경험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으로, 스스로의 목표를 향한 부단한 노력이나 운(運)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아래, 거저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은혜(恩惠)라고 부른다.
여기서 거저 주어진다고 한 부분에서 우리는 근본의 힘에 의해서 누구에게나 똑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어느 누구는 깨달음의 겸손한 경지로 나아가지만, 또 누구는 이를 미워하고 배척하여 근본을 부인하는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 대목에서 하나 중요한 것을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근본의 에너지인 진리의 빛을 대하면서도 누구는 감사로 빛을 받아들이는 반면 또 누구는 어둠이 좋아서 빛을 떠나는 자들도 있다. 이러한 현상을 막연히 개인의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의 문제로 돌리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 논리라 하겠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이와는 다르다.
성서학적(聖書學的)으로는 예정론이라든가, 섭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필자도 이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진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권과 예정론 내지는 섭리론(攝理論)을 동시다발적으로 세상 편의상 혼용(混用)해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만물을 포함하고 용서하는 진리라는 그릇에 이도 당연히 포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리라는 대전제(大前提)가 있으면, 비(非) 진리인 것도 존재하듯이, 이는 하나 되는 진리의 뜻에 반하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을 때에 분명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모든 세상만사가 창조되고, 다스려지고 운행(運行)되어 진다는 것을 순종(順從)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고 분명하게 인정 되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구원의 길은 아무에게나 열려진 문은 아니다. 아니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점(觀點)에서 의지(意志)나 결단(決斷)으로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주(創造主)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창세전에 미리 계획된 대로 선택되어지고 실천 되어지는 관점으로 살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좁고 협소한 문을 지나야 한다고 했지 않았는가?
이것이 예정론(豫定論)이나 섭리(攝理, The Providence)라고 하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깊은 의미라고 하겠다. 우리에게 선택권(選擇權)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들에게 나려지는 은혜(恩惠)의 빛이요 영광의 빛이라고 한다.
진리는 이렇듯, 만물의 근본으로서 갓 난 어린아이가 그리는 어머니의 품과 같지 않을까? 아무런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 상황을 뛰어 넘는 상태다. 이를 우리는 ‘평온(平穩)’이라고 하고, ‘평강(平康)’이라고도 부른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가 느끼는 감정처럼, 진리는 우리를 평안하게 하고 자유하게 한다.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온유(溫柔)함, 이런 상태를 우리는 천국(天國)이라고 부른다. 바로 진리로 채워진 진정한 하늘나라의 모습이다.
우리가 진리와 하나로 짝했다고 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로 이러한 진리가 가지고 있는 평강의 속성을 누리고 있어야 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 세상에 몸담고 있는 이상, 이러한 진리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진리와 짝하며 살기는 불가능하다고 모두가 여길지도 모른다. 당연한 생각이 아닐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렇다고 이를 무작정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와 짝한다는 것은 영구불변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거나 변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불가항력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진정으로 진리와 하나 되어 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믿음이라는 편리한 도구를 사용하면 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진리의 능력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지옥에서라도 천국이라고 믿고 주장하면서 따르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불행이 닥친다 하드라도 어린 아이는 엄마의 품 외에는 달리 선택도, 다른 생각을 가질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자가 없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는가? 어린 아이가 되라는 가르침의 이면에는 또 다른 큰 가르침이 있다.
“진리와 짝한다”는 말은 “진리와 하나 되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나’라는 존재(存在)와 자아의지가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는 자기를 부인할 자아가 없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와 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 문으로 들어가는 능력이다.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처럼, 매일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인(自己否認)을 확인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피조물(被造物)인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숙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영원한 진리의 동반자로서 구원의 천성 문을 들어갈 수 있다. 어린아이가 장성하면 할수록, 부모를 진리로 여기면서 누리는 평강(平康)을 빼앗기게 된다. 그것은 ‘나’라는 자아의식(自我意識)이 생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인간은 이러한 자아의식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떠나라”고 가르치고 있다. 떠나서 광야(廣野)에서 하나님을 만나, 자아를 버리고, 진리인 부모의 품으로 회복(回復)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근본 진리이기에 우리를 진리와 짝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인생 광야로 부르신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진리와 짝하게 하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유일한 축복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믿음으로 구원의 새로운 세계를 능히 소유할 수 있다. 문제는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믿고 순종하며 의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깨달음과 믿음의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결정적인 요소는 그에 대한 대상과 방향성이다.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대상과 방향을 분명히 정해야 한다.
이것이 잘못되면, 아니함만 못한 심각한 폐해를 당하게 된다. 마치 좌표계에서 + 와 – 의 양방향의 좌표가 있듯이,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방향을 잘 못 잡으면, – 방향으로 원래의 + 도달점과는 반대로 달려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어에서는 ‘~으로’ 라는 방향을 나타내는 어원이 히브리어 전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우리가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깨달음의 의미를 나타내는 길 ‘도’ 자도 방향을 나타내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길은 마지막 종착지로 향하는 방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숭배대상이 난 재해 있다. 걱정이 많은 만큼, 두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잡신들이 득실거리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섬나라인 일본의 무속 신앙과 인도지역의 힌두교를 들 수 있다. 이들이 섬기는 신은 수도 없이 많을 뿐만 아니라, 하물며 악신도 두려움의 신으로 섬기며 그들을 달래면서 우환을 방지하려는 눌린 사상으로 노예같이 살고 있는 실정이다. 죽은 조상의 신을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 삼라만상의 온갖 만물에 신의 의미를 부여해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섬기며 스스로 위로 받고자 하고 있다.
소위, 그들이 두려워 섬기는 대상인, 잡신들이 과연 그들에게 무엇을 이롭게 해 줄 수가 있는 것일까? 사실 아무 것도 없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고? 아니면,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고, 또한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해 주고, 신변잡기를 잡아 주기로서니, 과연 그런 정보들이 무슨 일상생활에, 나아가서 영혼구원에 무슨 큰 유익이 있는 것일까?
물론, 이를 통해서 길흉화복을 예언해 주고, 생활의 복을 받을 수도 있겠고, 또한 지금보다는 더 나은 속세의 부를 축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굳이 잡신을 통해서 난리굿을 치면서 신통력(神通力)을 가지지 않더라도 타고난 재화(財貨)에 대한 재주나 안목이 있던가, 안목이 없더라도 재수(財數)나 운(運)이 좋아서 운수대통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더 많다는 것은 삼척동자들도 다 알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아니던가?
그렇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깨달음과 믿음을 추구해야하는 대상과 방향은, 적어도 잠시 머물다 언젠가는 사라질 세상적인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면, 남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한 발걸음과 인맥 관리를 통한 정보 분석 내지는 부모 잘 만나거나, 마누라 잘 만나기를,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관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성이면 감천이 되는 것이 세상사의 전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지성으로 한다고 해도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진리를 대상으로 해서 진리의 방향으로 부단히 나아가는 것이다.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깨달음이나 믿음, 세상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하고 행하는 행위를 단호히 거부하고, 떠나지 못하는 한, 그 인생은 언젠가는 세상에서 사라질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진실은 영원한 불가마에서 태워져야하는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