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l

사랑은 죽어서 부르는 영원한 노래!

“-사랑의 최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갈망하지만, 사랑을 지키는 일에는 최선보다는 관행적인 습관에의 의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랑은 익숙해지면 서로에 대한 관심이나 소중함이 보편화 되어 버리고, 그것을 견디지 못해 결별의 지점에 선다.

나를 포함해 사랑을 실패해 보지 않은 남녀는 없을 것이다. 실패한 사랑은 그 실패의 당위성을 찾아 합리화 되면서 남녀의 열애는 길어야 2~3년이고 그 뒤로는 정이든지 결별이든지를 선택하려 든다. 그러나 사랑은 최후가 없다. 있다면 당사지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사랑은 연속되는 드라마로서 영원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지치거나 또 다른 욕망에 홀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카레니나’ 에서도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시작 단계의 열정에만 집착되어 있어 결국은 자살이라는 난파선이 되고, 키티와 레빈은 사랑의 뿌리인 존중을 지속적으로 키워나가는 커플로 사랑이 사회 환원의 역할까지 이어 나간다. 

사랑을 시작했다면 사랑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저절로 사랑이 눈사람이 되어 굴러 가기를 기다리지 말자. 그 연구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연구 주제이며 논문이며 학술이다. (글과 사진: 해랑)”

재미 있는 내용입니다. 재미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저자로부터 사랑에 대해 결코 떼어 놓지 못할 미련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를 찾고는 있으시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이미 사랑의 불가함에 대한 단정을 내리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은 결코 제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행해야할 연구나 공부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사랑에 대한 신비로움이나 애타는 희열의 감정을 놓친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그것은 식은 죽과 같은 아무런 맛도 감정도 도출해 낼 수 없는 구챦은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사랑은 그야말로, 안나 카레니나의 두 연인, 안나와 브론스키의 비정상적인 모습에서 만나는 종류의 것은 아닐까?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함축해서 은밀하게 엿보게 하는 사랑의 진실을 톨스토이의 위대한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톨스토이 자신도 키티와 레빈의 미적지근한 결혼 생활을 통해서 이 사실을 역설적으로 시인하고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요? 

인생에서 사랑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쟁과 흡사합니다. 그곳에는 게으름이나, 다른 기타의 인간의 가식적인 변명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이루지 못할 사랑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애증의 극과 극의 감정이 낳은 사생아입니다. 사랑은 필히 실패해야 합니다. 사랑의 저변에는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이야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사랑이란 없습니다. 교과서에서나 만나는 사랑은 박제된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 사랑, 몸을 던지지 않는 그런 사랑은 사랑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지요. 세상 눈으로 보면 오히려 변태적인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이지요.

애들의 작난 같은 사랑은 이제 그만 자리를 내어 놓아야 하겠지요. 자신이 없으시다고요? 그래요, 당연한 답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사랑할 자격 없는 사람만 세상에 남아, 세상 사랑 타령만 무성해서, 쓰레기 더미에 피는 잡초 마냥 이름 없이 메아리 쳐 옵니다. 

사랑은 죽은 사람들 만이 부를 수 있는 낭만적인 노래는 아닐까요? 아마, 살아서 사랑 타령을 부르는 사람은 없어야 할 겁니다. 사랑은 죽어서 부르는 영원한 노래랍니다. 실패의 노래랍니다.

♡ 응재 곽계달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