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는 나무에 붙어야 열매를 맺는다!
우리 존재는 과연 어떤 모양으로 표현 될 수 있을까? “공수래 공수거?” 원점으로 돌고 돌기에 누구는 곡선 위에 있다고 멋지게 표현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중국 고대에 살던 어느 현자가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의 명을 받고, 하늘의 DNA 를 타고 태어 나서, 세상 경험이나 교육을 받기 전에 이미 의식 세계를 가진 자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세상에 대어나서 세상 교육을 통해서 길들여지는 부류이고, 마지막 부류는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분류 된다고 했다.
아마도 당시에는 천자나 사대부나 민중으로 계급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뭏든, 의식 세계와 연관 지었을 때에 충분히 이를 공감을 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필자는 우리의 존재 모습을 나무에 비유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의 존재는 나무 같이 일정한 점에 서서 깊이 땅속으로 뿌리를 밖고, 하늘로는 가지치기를 하며 뻣어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만상은 쉬지 않고 변하지만 나무는 굳건히 서서 있는 것처럼, 나무는 한 점에 서 있지만, 끊임 없이 변화를 강요 당하면서 겪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지?
그 이유는 본인은 어릴 적, 사물을 인지하는 때부터 지금까지 근본 자아는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혼자 서 있는 나무를 볼 때마다,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고, 언제나 오랜 친구 마냥 친근감을 가진다.
인간 존재의 근본은 나무가 꼿꼿이 서 있는 것처럼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속 된다. 이는 직선도 아니요, 곡선도 아니고, 차라리 직선과 곡선이 함께 혼재된 입체적인 특수 모형으로 표현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를 카오스라고도 표현할 만큼, 그 원인과 결과를 통해 유추는 해 보지만, 그 과정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라고 할만큼, 복잡하기만 한 것 같다.
이 시점에 와서 그래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면, 우주라는 큰 몸통의 한 지체로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에 하나 몸통도 아닌 지체가 몸통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공수레 공수거의 헛 되고 헛 된 일이 될 것이다.
지체의 존제 이유는 몸통에 붙어 있을 때에만, 그 진정한 존재 가치를 이룰 뿐이지, 지체가 스스로 존재 가치를 찾고자 시도한다면 이거야 말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만고 진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 응재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