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눈, 신의 눈!
자기 안에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우월감, 파시즘적 이기심은 자연적인 인간의 그릇이 담고 있는 본성입니다. 우리는 영어로 이를 Natural Life 라고 부릅니다. 자연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흙에 속한 인간 육신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것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보편적 특성이라서, 이름 그대로 세상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히려 이를 제거하고자 하거나, 거슬리고자 하거나, 대적하는 것이야말로 극히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감수하면서 해야한다는 거지요.
그러니 행복한 개인이나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 한, 현실적으로는 경쟁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타자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최선을 경주해야 생존이라도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세상 행복의 척도가 된다는 겁니다.
고로, 우리의 내면에 들어 있는 파시즘적인 이기심이야말로 숭배해야 하고, 잘 가꾸어야 하는 대상이지 제거하고 버려야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지요. 결국은 행복의 관점을 바꾸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인간적인 노력이나, 수고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먼저 선행 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세상 인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는 절대로 타자를 배려하는 눈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시나마, 타자의 눈을 가질 수는 있다해도 결국은 자신의 눈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는 시지프스의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간 스러움을 지켜내는 것도 사실은 어려운 과제입니다. 일생 동안을 수많은 교육과 가르침과 배움과 체험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현실이고, 결국 이런 장식들이 인간의 올무인 셈입니다.
어쩌면 문명사회의 모든 이기가 편리한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모두가 스스로 채운 족쇄에 지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명사회로 물든 가정을 비롯한 직장과 사회로 구성된 이 세상을 슬기롭게 이겨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합니다.
인간은 소속감이 없으면, 불안해 합니다. 그럼으로서 인간은 문명사회라는 허울 좋은 성을 쌓고, 서로 간의 관계를 맺으면서 생존의 두려움을 이겨 가고 있는 격입니다. 우리가 성 안에서 보호 받고자 하는 보호 본능이 있는 한, 무슨 수단을 동원해도 자아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이 원인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한 교만의 죄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결국 문명이라는 이름의 두려운 성은, 원래 사람에게 부여한 하나님의 영으로 회복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잠재하고 있는 잊어버린 신의 능력을 되찾아 사용해야하는 겁니다. 그럴 때에 님이 원하는 모든 문제와 의문이 일시에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이렇듯, 인간의 차원에서 신의 차원으로 신분을 달리할 때에 낮은 차원의 모든 문제는 일시에 눈 녹듯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당신이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모든 우상의 관계, 소속된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모든 장벽을 넘어 설 수 있는 겁니다. 신의 차원에서 볼 때에 이 모든 세상 관계는 죄에서 비롯된 원수의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극복하게 하는 것은 타자를 지배하려는 자아의 눈을 타자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신의 눈을 가져야하겠지요. 그것이 타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 응재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