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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생존을 비교하지 마라!

좌우이념과 생존 이데올로기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작가의 자존심이 살짝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아직도 그분은 투철한 작가 정신과 이데올로기 정신의 틀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어찌 사상이나 소소한 이념 문제를 생존과 감히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는가? 그리고 과연 생존을 이데올로기라는 올무로 덮어서 생존의 가치를 비속화시키는 사실을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요? 

생존은 스스로 가치를 정할 만큼, 위대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생존은 다른 주체로부터 침범 당하면 안 되지요. 

생존을 핑계로 정의와 역사를 거슬리는 행위는 당연히 비난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의와 인류 역사가 생존 보다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안데스 산에 추락한 비행기 승객들이 구제 되었을 때, 생존자들이 동료의 인육을 먹고 생존했다고 했지요. 이런 예가 어디 한 둘인가요? 

AD 70년경 로마군이 예루살럼성을 오랜 동안 포위하고 전멸시키고자 했을 때, 성내에서는 굶주린 부모가 자식들의 인육을 끓여 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누가 감히 이들을 지탄할 수 있을까요? 작가님일까요? ㅎㅎㅎ 당해 봐야 안다고요? 그러게 생존의 절제절명의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생존을 위해 강요 된 사람의 일을 들어서, 제 삼자의 입장으로 함부로 이야기할 처지는 되는 않는다는 겁니다.

생존이란 그 상황에 처해진 당사자 외에는 어느 누구를 불문하고 언급은 극히 자제해야 합니다. 제주 4.3사건을 예로 들었는 데, 이는 작가가 너무 오버한 나쁜 예가 아닐 수 없는 거지요. 

그 이유는 분명히 치열한 좌우 이념으로 인한 부득이한 비극적인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도 없는 강요 가운데 생존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을 들어서, 생존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모르는 미련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시대에 맞지 않는 값싼 영웅주의에 젖어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값싼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이히만의 재판을 들어서 생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도 사례에 어울리지 않는 예가 아닐 수가 없지요. 

보호해 줘야할 생존과 그렇지 않은 생존 조차도 구별하지 못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존이란, 지켜야할 만한 가치 있는 생존을 대상으로 주제에 맞게 전개 되어야 마땅한 거지요. 

유명 작가라는 짐이 아마도 그분에게는 너무 큰 짐으로 보이네요. 작가란 최소한으로, 작가라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시대를 망라해서 감동을 주는 작품을 완성할 도리가 없는 거지요. 

모든 시대를 걸쳐서 공감을 줄 수 있는 공통 분모인 인간 세상의 배반과  부조리와 인간 스스로 다다를 수 없는 한계로 인한 목마른 심령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간에, 인간에게는 보호해야할 생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 응재 곽계달 ♡

생존에 대한 이은말들:

개인에게 생존이 없이 가치가 결정 된다? ㅎ 생존이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윈의 진화론에 우리 인간은 모든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 진화론의 근본 가치는 적자생존, 즉  마지막 까지 남는 생존에 두는 겁니다.

여기서 생존이란, 그저 근근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비겁한 수단이 아니라, 절제절명의 순간에 처한, 소중한 생명의 헌신에 대한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생존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린 아이를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은 어느 성직자의 생존이나,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못밖힌 예수의 생존이 아닐까요? 

생존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예 중의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다수결에 대한 민주주의의 사회정의를 고발하기 위해서 기꺼이 독배를 마신 생존의 사건들입니다. 당연히, 생명이 귀하듯, 생존이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를 예를 들게 되면, 자칫 인간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잘못 신과 종교의 주제로 빠질까? 우려를 하면서 올렸습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면 합니다. 다만, 결국은 생존의 참 의미는 신앙으로 잡아야할 것 같아서, 미리 암시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ㅎ 

주신 말씀을 다시 상고하면서 살폈습니다. 가치가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부분적 예시입니다. 어쩌면, 가치와 생존은 동전의 양면이겠지요. 

그리고 그 상황에 가봐야 예수에게 순종할지, 아니면 생존을 위해 베드로처럼 배반할지는 본인의 생존에 대한 애착심에 따라 결정 되어지겠지만, 이것도 결국은 생존의 가치로 인해 결정 되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가치가 생존을 결정한다는 의미와 생존이 가치를 결정한다는 의미는 동일하지만, 가치와 생존? 누가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저는 먼저 생존이 있고 가치를 다음에 여긴다는 우선 순위의 뉘앙스로 드린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좋은 말씀인 것은, 결코 피조물인 인간은 사랑을 스스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마치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달의 모습에 비유 됩니다. 과연 그 신의 은혜의 빛 속에 사는 반사체가 어찌 신의 경지를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죄인 된 때에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것이고, 그로부터 사랑이 먼저 시작 되었고, 또한 그로 인해 이 땅에서 사랑이 완성 될 것입니다. 그 길은 험하고 좁다고 했습니다. “내가 다시 왔을 때, 선한 자를 만날까?” 하신 예수의 말씀이 문득 생각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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