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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가 더 큰가?

본인과 이건희 삼성 총수와의 차이는 우선 해외 유학 중, 구입한 자동차 대수와 가격에서 차이가 나네요. 본인은 딱 한 대만 구입하려했는 데, 부득이 두 대를 구입하는 것으로 되었지요. 

첫 번째 구입한 차는 불란서 유학 중에 운전면허를 신청한 상태에서, 뚜껑이 열려지는 중고 퓨조 2인용 청색 208 컨버티블을 미리 구입해서 기숙사 앞에 세워 놓았는 데, 방학 중에 도독을 맞아 잃어 버렸지요.

인연이 없었던 게지요. 

잃어 버린 차가 마음에 얼마나 들었던지, 그때의 아팠던 감정은 지금까지 첫사랑의 애톳한 감정으로 이어 와서, 지금 타고 다니는 차가 퓨조 208과 유사한 사브의 청색 콘버티블을 고집스럽게 10년 째 타고 있습니다. 얼마나 차를 사랑하는지, 100 년이 지난다해도 마누라 자식은 따로 갈지언정, 이 차와는 100년 해로 해서, 죽을 때에 무덤에 까지 몰고갈 뜻을 굽히지 않고 있지요. 

두 번째 차는 똥색 대형 폭스바겐입니다. 이때는 잃어버릴 각오로 당시 1000 프랑을 주고 중고를 사서 3년 반을 타고 학위가 끝나고 돌아 올 때에, 깨끗이 수리를 하고 광을 내어서 같은 값에 팔고, 고국으로 돌아 온 거지요.

폭스바겐으로 방학 동안에는 거의 유럽을 다 돌아 다녔으니, 그야말로 뽕을 빼도 빼도 한참을 뺀 거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건희 총수와는 비교 되지는 않겠지만, 같은 자동차를 두고, 바라 보는 가치 기준은 다르게 나타 난다고 해야겠지요. 

가난했던 유학생활 중에, 생존의 수단으로 살아야 했고, 일생 여행을 목표로한 필자로서는 나름대로 최상의 투자 대비 효율을 얻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결과를 놓고 비교해 본다고 하면, 한 분은 세계 최고의 기업군을 이루었고, 필자는 여전히 BMW(Bus+Metro+Walking)  를 즐겨하면서, 인생 핵심 가치를 이렇게 한가하게 페북에 올리고 있다는 다른 사실을 들 수 있을 뿐입니다. 

인생 핵심 가치 판결은 살아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죽어서 평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도 갖고 있으니, 누가 더 진실에, 또는 진리에 가깝게 살고 갔는지에 따라, 인생 가치가 결정 된다면, 평결이 어떠할지는 사뭇 기대가 되는 바이지요.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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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의 세계 1위 방정식(3)-①] 미국 유학시절에 차를 6번이나 바꿨던 이유》홍하상 작가 

와세다 유학이 끝나자 이번엔 미국의 조지 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과 부전공으로 매스컴학을 공부한다. 미국 유학 시절, 그는 자동차에 빠졌다. 이건희가 자동차와 처음 친해진 것은 7살 때, 당시 아버지 이병철이 1948년형 미국산 시보레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징발해 박헌영이 탔다는 바로 그 차였다. 

자동차 대국, 미국에서 그는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재벌집안의 막내 아들로서의 호사취미가 아니라 차의 구조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산차는 이집트 대사가 타던 차였다. 50마일도 타지 않은 새 차였다. 아랍전쟁이 터져 이집트 대사가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급하게 내놓은 차를 그가 사게 된 것이다. 새 차값이 6600달러였는데 그는 4200달러에 그 차를 샀다. 서너달 그 차를 타고 다니면서 차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곤 깨끗이 분해소재한 후 600달러를 남기고 팔았다. 이어 미국인이 1년도 안탄 증고차를 사서 타고 다니면서 구조를 들여다보고 다시 왁스를 먹이고 청소한 후 또 팔았다. 그런 식으로 1년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돈도 600~700달러쯤 벌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의 구조에 관해 점점 전문가가 되어갔다. 그의 이런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은 그 후 삼성이 중요기술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상당한 작용을 했다. 말하자면 반도체를 스택(위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트렌치(파고들어가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단안을 내린 것도 그 자신이었고, 핸드폰의 크기, 단추의 위치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 소위 <이건희 폰>을 만든 것도 그 자신이었다. 그는 또 방송사에서 송출된 화면이 TV수상기에 비춰질 때 화면 좌우에서 각각 8mm씩 잘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개선을 지시, <숨겨인 1인치를 찾았다>는 광고문안으로 유명한 명품 플러스 원 TV를 탄생시켰다. 그는 경영자 시절, 세계적인 가전 회사들의 신제품이 나오면 곧바로 사서 뜯어보고, 다시 재조립한다.

이건희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기계광이다. 그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보다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미래공학 등의 책이 더 많다. 훗날 67년부터 87년까지 선대 회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을 때도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퇴근 후에는 기계와 씨름했다. 전자제품이나 각종 기계를 분해해보고 다시 조립하면서 그 기능과 성능을 공부했다. 기술관련 서적도 숱하게 보았고, 그래도 잘 모를 경우엔 아예 일본기술자를 집으로 불러 직접 설명을 들었다. 그의 집을 다녀간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명이었다. 그러한 노력 덕택에 그는 전자부품의 소소한 기능까지도 두루 꿰고 있다.

이건희의 미국 유학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힘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었다. 미국이 강한 것은 ‘달걀을 품어 알을 까려는’ 에디슨과 같은 사람들이 원천기술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디슨처럼 지금까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을 창조해낸다. 그것이 미국의 힘이다. 판을 새로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미국은 상상력을 허용하는 사회이다. 반면에 일본은 원천기술을 응용한 생산기술의 대국이다. 일본과 미국에서의 유학 경험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반도체, 휴대폰과 LED TV를 만들어 새로운 판을 짜고 자기 씨름판을 스스로 만든 원동력이 된다.<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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