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라는 고속열차에 무임승차 하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일서 4:10>
“우리가 그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한 것이라.”
우리는 아무리 다가 갈려고 발버둥쳐도, 다가 갈 수 없는 것이, 비단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 뿐만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도 우리의 허다한 노력과 수고에 상관 없이 우리는 진정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음으로서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진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이루겠다는, 구약의 바리새인들의 근본 노력들이야말로, 헛 수고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진리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한자를 ‘도’라고 해서, 길 ‘도’자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진리의 길 위에 있다는 의미이고, 이는 진리란,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로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경 본문에 나타난,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을 우리가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부터,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본질을 미루어 터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보게 된다.
사랑도 우리가 먼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직 죄인 된 우리를 친히 찾아 오셔서, 우리가 그 사랑과 하나 되게 하시지 않았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직 진리 되지 못했을 때에, 진리 되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으로 들어 오셔서, 우리가 진리 되게 하신 것이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진리를 추구해서 진리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와 하나 됨으로 해서, 우리가 진리와 합하여 하나의 진리로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리라고 하는 기차에 무임 승차하게 됨으로 해서, 진리가 가고자 하는 마지막 종착역까지 우리의 별 노력 없이 다다를 수가 있는 격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른다.
여기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는 바른 의미도, 우리와 합한 진리로 인해서, 우리가 자유하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진리 자체의 속성이 자유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진리가 자유하는 것이기에, 진리가 진리와 하나 되지 못한 우리를 강제로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와 합하여 하나가 될 때에, 진리의 속성인 자유를 우리가 누린다는 진정한 의미가 된다. 내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되지 않는 한, 자유할 수 없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진리는 “나는 스스로 존재한는 자(I am who I am)” <출애급기 3:14>라는 하나님을 지칭하게 된다.
복음을 전도하는 것도 진리와 하나 됨으로서, 스스로 등불의 빛을 발하여 세상 끝까지 전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먼저 우리가 진리와 짝하여 하나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함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선행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칭의의 의미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는 것과 복음이 전파 되는 ‘전도’와 똑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진리의 절대 권위 앞에 서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부터, 진리와 하나가 되는 기본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도 하고, 행위에 반하는 바른 ‘믿음’이라 하고, 또한 ‘회개’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