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비시(Vichy)!
해방후, 소위 일본에 부역한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던 대한민국과는 다르게, 불란서는 이차대전이 끝난 후에 드골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독일에 부역한 인물들에 대한 과거청산을 치룬 나라 입니다.
그런 연유 인지는 몰라도, 필자가 불란서에 머물 때에도 불란서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유쾌함 뒷 면에, 이차대전 후에 국내에 벌어졌던, 여러 비극적 사건들에 대해 스스로 침묵을 지키려고 했지요. 부끄러움을 넘어서, 회복 되지 않은 깊은 상처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에 파리를 거쳐 6개월 간 불어 교육기관인 카빌람에 머무느라, 작은 도시인 비시와 인연을 맺어서인지, 예사로 보이지가 않네요.
비시는 주로 늙은 이들이 많이 사는 작은 휴양 도시로 가을과 겨울 동안 머무는 동안에 아침 마다 창가에서 들려오는 비들기 소리와 낙엽으로 덮인 아름다운 강변을 산책한 때가 그리워지네요. ㅎ
당시에는 무어가 그리 긴박하고, 여유가 없었든지, 역사적인 유명 유적지였던, 비시정부청사 조차에도 관심을 쏟지 못하고, 이렇게 늦게나마 페친의 사진으로 당시의 아름다웠던 향수에 젖어 봅니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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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도 우리나라의 친일 정부와 같은 친 히틀러 정권이 2차 세계 대전 중에 있었습니다.
남불에 위치한 비시라는 작은 도시에 이 정부가 세워졌기에 이를 비시 정권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개혁교회 역사 탐사를 위해 비시를 지나칠 때면, 빠뜨리지 않고 비시 정권이 있었던 건물을 방문하여 찰라를 위해 영원을 포기하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확인하곤 합니다.
사진 뒤로 보이는 곳이 바로 비시 정권이 들어섰던 그 건물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드골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가 제일 먼저 할 일이 나치 협력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애국한 국민들에게는 상을 줘야 하고 민족을 배반한 범죄자들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어야만 한다. 새로운 사회 건설을 함에 있어 혹시나 나치 협력자에게 면죄부를 주어 그들을 재등장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면 절대로 국민을 단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민족의 배반자들은 자신들이 다시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애국적 국민을 이념적으로 분열시킬 것이고 국민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을 할 것이라고 드골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드골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반역자를 숙청했습니다. 무엇보다 언론인들이 첫 번째 심판대상이었고
나찌 주의에 협력한 언론인 모두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언론은 한 나라의 도덕성적 상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드골은 비시 정권의 수반인 페탱에게 조차 사형 선고를 했는데 페탱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의 영웅이며 개인적으로는 드골의 군대 선배임에도 드골은 사사로운 감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무기로 감형)
비시 정권의 라발 총리의 경우는 사형선고 후 바로 처형되었습니다. 드골은 200만명을 나치 협력 혐의로 내사하였고 그들 중 99만 여명을 체포해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6,763명에게 사형선고(사형집행 767명), 2,702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 10,637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 22,883명에게 징역형, 2,044명에게 금고형이 선고되었습니다.
7만 명에게 시민권을 박탈했으며 공무원 12만명에게는 파면 등 행정처분을 내렸다고 합니다. 비시 정부 청사 앞에는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이는 유대인들이 세운 것입니다.
그 내용은 1942년 8월에 비시 정권이 세워지면서 비시 정권은 6,500명의 유대인들과 수 백명의 아이들을 체포하여
나찌 정권에 넘겨주었다는비시 정권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천주교 사제들과 개신교 목사들이 즉각적으로
친 나치 정권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반대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며
지난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내용의 비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