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구별하지 않는다!
“탐닉과 집착은 현실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과 게으름이라 불리는 죄의 근원에서 나온다.”
재미 있는 사실은, 죄라는 근원이 절대 선이 창조한 창조물에서 유래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럴 경우에 과연 절대 선이 죄의 근원을 탓할 수가 있을까?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인과응보의 이론에 입각해서 보드라도, 결국은 피조물의 인생은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원인과 결과 사이를 다람쥐 챗바퀴 돌아 가듯, 의미 없이 돌아 가는 것은 아닌지?
의미를 부여하고자하는 피조물의 수고가 죄와 벌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선악과의 판단과 창조주 하나님도 정하지 않으신 정죄라는 항목을 인간 사회에서 문명이라는 성을 쌓고, 이들을 정당화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원시 인류 문명이 죄와 벌을 조작해서 사회라는 조직을 완성하게 된 것이고, 성경에서는 이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허울 좋은 교만의 상징인 바벨탑의 이야기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을 때, “불안정하고 예측할 수 없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으로부터 신이 창조 되었다”거나, “신이 죽었다”는 철학자들의 주장이나 사고가 전혀 근거 없다고 무시할 수 만은 없다.
과연 신은 전지전능의 힘을 이용하여 사랑과 심판의 일을 동시에 행하시는 분이신가? 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적절한 판결을 내리시고 죄의 도가니에 빠진 인간 군상을 정의와 선의 길로 인도하셔서 과연 신은 공의로우신가? 신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는 경계가 없는, 거칠 것이 없는 영원의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다.
법원에 가 보면,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기울어진 청평을 들고 서 있는 천사의 입상을 만날 수 있다는데, 공교롭게도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바로 이 정의의 여신이 떠오르는 것도, 인간 사회에서 지어 낸, 심판하는 무서운 신에 대한 편견을 강요 받은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신은 공의롭다”는 의미는 신이 스스로 내린 정의대로 “신은 스스로 존재할 뿐, 사랑이나 심판이라는 인간이 내린 판단 속의 좁은 틀 안에 갇혀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이 공의롭다는 의미는 신은 영원하다는 의미와 서로 일맥상통한 내용으로, 스스로 존재하지, 판단 하지도, 판단 받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신은 구별하지도 받지도 않고, 또한 신은 정의 되지도 또한 정의를 내리지도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스스로 계시는 분이 어찌 창조자로서 피조물을 구별하시고 또한 피조물로 하여금, 사랑과 죄와 벌을 구별하실 것인가? 그분은 애초에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계신다. 그것이 스스로 계시는 것이고, 구별할 수도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로 구별 되지도 않는다. 애초에 모두가 하나로 있었고 또한 영원히 하나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신과 하나 되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잘못 된 허망한 생각은 아닌지? 이제부터라도 잠잠히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스스로 있고, 영원히 존재하는 진리 안에(주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진리로부터 벗어나서, 진리를 타산지석으로 여기고자하는 인간의 망상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신과 하나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발로 걷어 차는 격이 되는 꼴이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신과 하나로 태어났고, 창세 이전부터 신과 함께 하나로 된, 스스로 존재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임을 마음 판에 새기고 누리며 살아 가는 소중한 존재로 거듭 나기를 기원해 본다.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