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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세상을 보랴, 하늘을 보랴?

가끔은, 과연 이 땅에서의 선한 행위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에 반하는 악한 행위가 무엇인가? 를 반문하게 합니다. 

진리란, 영생이라는 정의로 대변해 봅니다. 영원히 살아서 지속 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소위 이 땅 위에서 가름하는 선과 악의 모습은 영생의 진리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성경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땅 어디에서도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가르침이 유효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위의 어떠한 윤리나 도덕 가치도 진리라고 주장할 자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고, 인간이 세워 놓은 모든 가치 기준, 즉 선과 악을 나누는 행위들이야 말로 헛 수고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선악과로 대변해서 명쾌하게 인간의 근본 죄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피조물의 자격으로서, 이 땅에서 주장하는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은 결코 우리들의 사고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인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이 인간의 가치 기준인 문자로 표현 되어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의 가치 기준은 절대적으로 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하늘의 보물은 땅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어서, 그 감추어진 보석을 켜야지만, 비로소 하늘의 비밀을 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보물이 만약, 세상에서는 관찰 할 수도, 볼 수도 없는 대상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그 보물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알자, 열심히 하나님을 알자”고 외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하늘의 보물을 소유하는 유일한 지혜의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실천하는 것을 우리는 ‘세상 행위’가 아닌, ‘믿음’이라는 단어로 나타내는 겁니다. 

선과 악으로 판단 기준을 삼는 세상 행위로서는 하늘에 올라갈 자가 아무도 없다고 했지요. 구약의 바리새인들이야 말로 세상을 대표하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행위주의자들이었습니다. 

과연 천국에서 그들의 똑똑함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이렇듯, 믿음의 눈은 세상 행위의 눈과는 달리, 우선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 보는 데서 부터 시작이 되고, 또 끝이 나야 합니다. 

그 어디에도, 세상의 불순물 찌꺼기를 갖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인 진리로 다가 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닌, 남을 판단하는 선악의 기준이 내 입술에서 떠나지 않는 한, 신성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과의 영원함이 상실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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