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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생명과 진리를 논한다!

왜, 대화론인가? 

헬라시절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플라톤은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화의 형식을 통해서 체계를 세워 갔다. 불교 세계에서도 티벳 불가에서는 수련기간 동안 끊임 없이 무리를 이루어 불경에 대한 난상 토론을 격렬하게 하는 광경을 본적이 있고, 홀로 벽을 마주 대하고 묵상수행 방법 가운데, 화두를 두고, 스스로에게 질문과 답을 주고 받는 가운데 대화를 통한 진리 탐구를 이어가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어떤가? 

그들의 대표 종교인 유대교에서 수행하는 모습은 상대를 정하고 이어지는 난상 토론을 통해서 유대교의 진리를 추구하고 있고, ‘탈무드’라는 걸출한 대화론으로 집대성 된 지혜의 작품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는 실속 있는 나라가 된 뒷 배경에는 그들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에서 유래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그 교육의 근원에는 대화의 기본이 되는  ‘질문하기’ 에 대한 가치를 최고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0년 전 유대인 이었던 하나님 아들인 예수는 어땠는가? 

그는 어부나 세리들 같은 잡동사니 장정들을 설득해서 열두 제자를 양성했다. 복음서를 통해서 보는 진리에  대한 그의 교육 방법은 끊임 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이에 대한 응답을 통한 대화록을 완성하는 형식을 고수했다고 하겠다. 

특히, 그는 눈으로 보이는 세상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대상의 진실을 가르쳐야 하겠기에, 질문하고 이해시켜야하는 대화의 소통이라는 문제에서 비유와 상징이라는 대화법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현대 기독교에서는 이를 해석하는 가운데, 대화의 본질을 벗어나서 이단과 삼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어이 없는 사태도 번번히 일어나곤 한다. 

예수에 대한 활동을 기록한 복음서에서는 어떤가?

열두 제자들과의 대화와 더불어 바리새인들과의 수많은 논쟁, 그리고 무지한 군중들과의 대화, 즉 설교형식을 띤 약간의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 예수가 부활 승천한 이후, 이 땅에 남은 제자들이 활동한 내용을 담은 사도행전과 마지막 요한 계시록 외에는 서간문이라는 형식으로 된 편지 내용으로 신약 성경을 완성 시키게 된다. 

왜, 서간문인가? 

질문을 던졌을 때, 당연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의사 소통의 효과를 극대화를 위해, 대화 기법을 채용한 편리한 전달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서신문 중에는 바울 사도가 성경 전문을 아우르는 폭넓은 통찰력과 깊은 경륜으로 성경의 핵인 로마서를 위시한 대부분의 서간문을 완성하게 된다.  

대화법의 기본 틀은 본인과 대화 상대가 서로 간의 의견을 정반합 형식으로 반복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하는 형식의 절차를 밟음으로 인해서, 주제에 대한 몰입을 위한 동기 유발을 특별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낼 수 있게 하는 데에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주제의 동기 유발이 쉽게 발동 되면서 몰입된 상태로 상승 작용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다른 방법과 비할 수 없는 대화록의 묘미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시대의 꽃인 소셜 미디어를 통한 크라우드 소싱과 함께 실시간 대화를 근간으로 하는 페이스북의 엄청난 파워는 이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고, 변함 없이 미래 세계를 약속하게 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페이스북이야 말로 인류 문화를 발전 시킬, 모세의 기적이요, 노아의 방주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페이스북의 역작용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역작용이 문제가 아니라, 극소수의 순작용을 통해서 인류 문명이 지향해갈 진리의 길을 뚜렷하게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데에 근본 의미를 부여하고자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야 말로 위키피디아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수많은 군중과 무리의 생각과 의지들을 한꺼번에 모아 실시간 대화를 쉽게 이어 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 수퍼 히어로라 아니할 수 없다. 

어쩌면 대화론의 최고봉은 대화 형식을 빌어 오는 댓글을 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인 대화는 편하게 사통팔방으로 물이 퍼져 나가는 듯, 흩어져 모이지 않을 수 있지만, 댓글로 쓰게 되면, 강물이 흐르듯, 바다라고 하는 마지막 집하장으로, 마치 소떼를 몰아서 우리에 몰아 넣듯, 유익한 지식을 정리해서 방향성과 목적성을 가지고 대화의내용을 실행할 수 있다 하겠다. 

더불어, 디지털 시대의 특징인 여러 미디어를 사용한 다양한 자료의 생산과 계속적인 자료 업데이트와 보관이 손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버리고 다시 취하는 기존의 지루한 방식이 아닌, 시공을 초월한 계속적인 업데이트가 새로운 신 시대를 도래하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 앎이 모여서 통찰력이 되고, 통찰력은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기에, 크라우드 소싱과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실시간 대화의 형식인 댓글이야 말로 가히, 이 시대에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하겠다.

더불어, 구글이나 네이버와 같은 편리한 지식 정보의 보고가 있어서 언제라도 대화에 필요한, 수도 셀 수 없이 많은 지식정보들을 간편하게 찾아 사용하게 하도록 일목요연하게 잘 짜여져 있어, 유비쿼터스적이고 전방위적인 즉답을 통한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세상이 대화라는 수단을 통해서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합 되어 돌아가는 신천지 개벽이 일어난 것이라 하겠다. (ㅎ ‘신천지’라는 전매특허된 용어를 허락 없이 함부로 사용해도 될런지 모르겠네? ㅋ 신천지네들 잘 봐 주소!)

신천지란 용어를 종교라는 꼭다리에 갖다 붙여서 사용하기에는 솔직히 너무 천박한 느낌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 용어를 종교라는 문 앞에 갖다 붙이는 순간, 신천지의 신비로운 거룩한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거짓으로 화장한 회칠한 무덤으로 간판을 내건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허긴, 예수 영을 접신했다는 교주 분의 모습이나, 곤룡포 입고 행차하시는 어슬픈 행각이나, 대화의 질을 보면 십중 팔구 신천지 간판을 걸 수 밖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지 않았는가? 하는 가련한 생각을 갖게 한다. 

문제는 대화의 고상한 질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태에도 그렇게 많은 오프라인 팔로워들이 따른다는 사실은 대화의 질과는 상관 없는 대중 심리에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는 히틀러나 뭇소리니 나 스탈린 같은 인간 내면에 깃들여 있는 사악하고 이기적인 공통 분모의 유전인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대화론’이라고 천명하는 것은, 위에 잠깐 언급한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 즉 진리와 생명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영원을 추구하는 무한한 여행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영생과 진리가 없는 것은 원래,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인, 대화가 부재한 부정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이에 걸맞게 ‘생명과 진리의 대화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동기가 되었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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