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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영의 사람들!

대체로 세상 생활에 적응을 잘 하고, 세상 살이를 탐닉하면서 즐기며 사는 사람들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비록 세상살이를 열심히 적응하고자 하고, 즐기면서 사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무엇을 해도 결코 즐겁지 않고, 허무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은 육적이 아닌 사람이라고 하겠다. 

육적이 아닌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세상 살이에 적응을 잘 하든 말든간에, 결국은 대인 관계를 위시해서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서, 남이 보았을 때에 그렇게 정상적으로 평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매우 건전하고 착하게 열심히 사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무리 가운데 있을 때에도 늘 혼자 있는 것처럼, 모래알 같이 남들과 하나로 어울리지 못하고 구별되어 지기 때문이다. 

간혹, 이러한 유리 현상이 자주 반복 되면, 결국은 단체나 조직 생활에서 배척이 되고, 조직의 쓴 맛에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해 가야 하나? 

우선 수동적인 방법으로, 육적인 것에 무관하게 살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결국 육이 주인인 세상에서 지속적인 자기 관리를 기대하기는 무리가 있다. 수동적으로는 결국 세상 육의 핍박과 시험으로 인해 노예가 되어 무너지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게 세상 인심이다. 

능동적인 방법으로서는 분명히 육과 구별 되는 다른 영역을 설정하고, 새로운 자신 만의 왕국을 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영적세계’로 구분한다. 영의 세계는 분명히 육의 세계와 구분 된다. 육이 아니면 영이고, 영이 아니면 육이지, 영도 육도 아닌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도 육도 구분 되지 않는 세계는 없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영이 아닌 모든 것은 육으로 구분 되기 마련이다.

일단 우리가 영의 세계로 구분 되어지면, 철저하게 영의 세계에 속했다는 사실을 선포 하고, 영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주장을 하면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육에 속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영의 사람임을 깨닫는다 할 지라도 육의 관습 때문에 하루 아침에 영의 삶으로 구별되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원히 육의 무게를 벗어 날 수 없다고 하는 게, 인간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영의 형상을 지닌 자가, 육의 행위를 반복하면서 살 수 만은 없지 않겠는가? 또한, 영의 사람 임을 선포하고 주장하면서 거룩한 사람으로 평생을 사는 것도 불가한 일 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영에 속한 사람일 수록 한 편으로는 육의 유혹과 시험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 되어서, 늘 영과 육의 갈림 길에서 갈등의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다고 하겠다. 

오죽했으면 성경의 바울 사도는 “나는 매일 죽노라!” 는 고백을 하였을까? 영의 사람은 바울의 다른 고백과 같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자괴감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다. 왜냐하면, 영의 사람은 육의 사람과 달리, 무엇이 육에 속한 죄인 것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무엇이 죄인지를 분별하고자 하는 의지나 특별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죄 안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면, 영에 속한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영에 속했다는 것’은 ‘영적 기준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이 기준을 벗어 나는 경우도 있지만, 기준을 벗어나는 오차 범위는 기준을 무너뜨릴 정도로 심각하지 않은 경우라 하겠다. 기준을 벗어나는 오차란, 죄에 해당하는 육적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신호 처리를 공부해 보면, 모든 신호에는 잡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 잡음이 신호를 분별할 수 없을 만큼, 크지 않은 경우에는 신호를 제대로 구별하여 소통을 하지만, 신호와 구별 되지 않은 만큼 오차인 잡음이 커지면 신호의 가치와 기준을 잃어 버리는 경우라 하겠다. 영에 속한 사람은 연약하여 아무리 육적 잡음이 오차로 섞여 생활한다 할지라도, 늘 영적 신호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마치 시계 추가 좌우로 흔들 거리면서 중심을 벗어 나지만, 결국은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영적 신호를 회복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렇듯, 영에 속한 사람은 ‘거룩’이라는 절대 기준이 정해져 있지만, 늘 들락날락 하면서 기준을 벗어나 타락한 육적 생활을 영위하고는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영에 속했다 할지라도 육적 유혹이나 시험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영에 속했다고 해서 성화의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다. 성화란 어느 면에서는 희망 사항이지 현실적인 설명과는 거리가 멀다. 성화 되지 않았다고, 또한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비록, 영과 육은 확실히 구별 되어져야 하지만, 영과 육의 갈림 길에 서 있는 인간이라는 매체 때문에 영이라고는 하지만 육과 완전히 분리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영을 향한 처절한 고뇌의 몸부림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육이 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리해 보면,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으로 분류 된다. 

각 자가 자기가 어느 부류에 속한 것인지 심사숙고 하면서 자신의 갈 길을 정하되, 영에 속했다고 결정을 내리면, 확실히 영의 세계에 걸맞는 확고한 행보를 걸어야 한다. 물론 성화의 길을 가야 하겠지만, 때로는 육의 관습을 벗어 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행보를 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왕왕이 인생 길에서 만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한 번 “영에 속한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비록 육의 관습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육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불상사는 결코 일어 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지, 정죄함이 없다고, 영의 사람이 거리낌 없이 육의 행위를 저질러도 괜챦다는 해석은 아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에 속한 사람이기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영광을 나누어 가졌다는 설명으로 해석이 된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고, 이는 하나님 사랑에 영원히 구속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을 누가 감히 왈가 왈부 하랴!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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