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Style

나인가? 신인가?

“나를 위한 믿음인가?

하나님을 위한 믿음인가?”

나를 위한 믿음이라면 이것은 교만이라는 이름으로 정죄 받아야 마땅한 것으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의 죄로 죄의 원인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나를 위한 믿음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믿음이라면 무슨 근거로 나의 믿음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장담할 수 있다면 과연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증거라도 있단 말인가?

허기사 피조물의 존재 자체가 창조자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그 존재감이 하나님을 위한 증거물이 될 수는 있겠다. 성경에서는 피조물의 찬양과 예배를 받기 위해 창조했다고도 한다마는 과연 전능자가 무엇이 궁하고 결핍되어서 피조물의 허튼 넋두리 찬양과 예배를 받고자 하시겠는가?

부족한 피조물이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위할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결론은 불보듯 뻔하다. 솔직히 믿음이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닌 오직 나의 구원을 위한, 나를 위한 믿음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확신하면 할수록 처음에 정의한 교만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모순적 문제에 봉착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신을 따르는 한 피할 수 없는 모순적 삶의 존재감, 이것이 부족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부과된 숙명적 딜레머가 아닌가 여겨진다.

결국은 인간이 행하는 신을 향한 믿음의 열정은 나와 동시에 신을 위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거양득의 편리한 변명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믿음이란, 오로지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순종하는 마음은 진리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는 추구의 마음이다.”

-K-스땅달-

“믿음은 인간 자신을 위한것에 한표!!

그리고 하나님은 신을 믿는 인간들의 믿음을 좋게보신다고 성경이 말함 ^^”

-권대석님-

이중 잣대로 신을 믿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신의 관점이 무어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네요? 교만의 죄로 볼건가? 아니면 긍휼한 잣대로 이중적 이기주의 인간의 믿음을 애교로 봐주실거나?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신으로 나아가는 그 인간의 갸륵한 발걸음이 얼마나 가난한 심령인가? 하는 것이 신의 잣대인 것은 확실합니다. 인간의 가난한 심령이 구원을 위한 신의 잣대입니다.

Kae Dal Kwack님, 신은 인간에게 신 자신보다 큰 위대한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 이런것? 예를들어

일관성 같은거 말이죠. ^^” -권대석님-

죄인의 처지인 불완전의 대명사인 인간과 완전자인 신은 원래 비교불가입니다. 인가과 비교대상이었으면 신의 존재가 나타나지도 영원한 창조주라는 의미도 부여되지 않았겠지요?

어쨌든, 전능자 신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았을 때는 홀로 울고 짜고하는 찌질이 철없는 아이에 불과할 겁니다. 찌질이 인간들의 행위를 재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엄하게 매로 다스릴건가는 순전히 부모된 신의 자녀에 대한 신의 교육관에 달려 있을겁니다.

“그런데 그런 불완전한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신은 확실히 인간을 자녀로 삼은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 자기 새끼니까!!! 신의 부모로서의 관점이?”

자녀다 부모다 하는 표현은 모두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언어로 포현되었다는 진실입니다. 의식도, 감정도, 생각도 모두가 인간적인 표현이지 신의 표현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인간이 신을 보는 것은 신에 대한 인간적 바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을 고도의 12차원적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우리 인간은 신을 이해할 도리가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전적으로 인간의 수준에서 서술하는 수준 낮은 4차원(5차원의 영성)의 신에 지나지 않겠지요?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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