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기독교가 바라보는 서로 다른 인간의 구성요소!
“인품이나 성품을 무시한 현대의 스펙 주의가 인간성과 사회를 황폐화 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를 구성하고 있는 3대 요소인 정기신의 조화로운 화합만이 각박한 인간성과 사회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한다.” – 김건환님 –
정기신의 적절한 조화로 소위 인간의 스펙이 완성 되겠지요.
문자적인 스펙이 아니라, 인품과 성품이 골고루 짜여진 인간의 입체적 스펙이 되어야겠지요.
문제는 문자든 입체적이든, ‘스펙이 다가 가기에 너무나 먼 당신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사실과 스펙 만능주의로 교묘히 스펙을 위한 가장된 인품과 성품을 가진 자들이겠지요.
특히 가면을 쓴 인품이야말로 가증스럽지만, 정의 세상에서는 이들이 성공의 가도를 달린다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끝은 죄와 사망으로 마지막 족적은 세상에서 병든 자들처럼 미미하게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정기신의 적절한 조화라는 의미의 뉘앙스는 매우 타당성 있게 듣길지는 모르지만, 성서적으로는 모순된 논리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정과 신은 절대로 함께 어울리도록 설명되지 않고 있는 것이 성서적 입장입니다. 성서에서는 정기신을 육혼영으로 불리우는데, 정기신의 조화가 좋다는 의미는, 철저히 정을 부인할 때를 의미합니다.
“한 입으로 축복과 저주의 말을 할 수 없다”거나,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물을 함께 낼 수 없다”는 간단한 말씀으로 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육을 부인할 때에 영이 주인이 되는 것이고, 영이 주인이 될 때에 비로소 조화로운 영혼을 가진 인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정기신의 조화는 정(육)이 죽고 신(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혼)는 정과 신의 중간에서 정으로도 신으로도 가지만, 정과 신의 선택에 따라서 결정 되는, 정과 신의 부속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요.
결국, 사람은 정기신의 삼위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정과 기는 철저히 신에 예속된 형태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 됩니다. 기를 생명력과 에너지력이라고 하셨는데, 매우 좋은 설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에너지의 원천은 단지 신으로부터로만 그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란 그 생명과 에너지를 흐르게 하는 수단과 통로에 불과한 거지요.
마치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통해서 정기신을 설명할 수가 있지요. 태양은 생명의 원천인 신이고, 정(음)은 이를 받아서 생명력을 활발히 유지하고, 기(음)는 태양의 생명 에너지를 정으로 도달하게 하는 흐름을 나타낸다고 설명할 수가 있겠지요.
이와 유사한 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로 역할은 서로 나뉘지만, 실상은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나뉘게 됩니다.
정기신의 삼위와 삼위 일체론이 다른 것은 정기신은 정(육)과 신(영)이 서로 반발하지만, 삼위일체론은 서로 하나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 안응 곽계달 ♡
“정기신은 소위 주역에서 음양 이론을 근본으로해서 살아 있는 인간을 구성한 것인데, 기훈련이나 단전호흡과 동양의학에서 많이 실용화 되어 있는 것으로 정은 안으로 모으고 응집하는 힘으로 형상을 만들고, 기는 발산하고 움직이고 변화하면서 정과 신을 하나로 묶어서 작용하게 하는 매체이며, 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물질을 구성하는 정과 기를 주관하는 자율적인 의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정기신 대신에 ‘질기영’으로 아래와 같이 발전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주만유가 영(靈)과 기(氣)와 질(質)로써 구성이 되어 있나니, 영은 만유의 본체로서 영원불멸한 성품이며, 기는 만유의 생기로서 그 개체를 생동하게 하는 힘이며, 질은 만유의 바탕으로서 그 형체를 이름이니라”
(원불교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