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의 딜레머?
“인간이 무엇인가?
생존이 절제절명의 답이다.”
생존이라는 절대적인 명제의 굴레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애쓰는 모습이 애틋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인간에게는 생존을 넘어서게하는 돌연변이(?) 현상도 많이 발생해서, 돌연변이로 해서 인류의 유전적 진보를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점이 인간이 생존에 전적으로 종속되는 다른 동물과 구별되어지는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늘과 땅, 신과 동물과 중간 쯤에 존재하는 지위로 자처하기도 합니다.
교만과 죄라는 용어는 단지 이러한 신과 동물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인간에게만 유독 적용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억울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신의 속성을 닮은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 특권은 아무래도 인간이 가진 다양성이라는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고, 인간이 생존이라는 절제절명의 한계의 구속으로부터도 얽메이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이 소유한 힘은 결국,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복 당하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국면전환을 시킬 수 있는 도전의 원동력을 창조하게 하는 거지요.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로 헤겔의 정반합 이론이 있습니다. 정이 있으면, 동전의 양면처럼 부가 발생하고, 부가 발생하면, 또한 정과 타협해서 합이라는 소통의 열매를 맺게 되는 거지요.
인간이 가진 다양성과 융통성은 단순히 동물의 생존 본능이라기 보다는 명분이나 허울이나, 체면이라는 용어에 더욱 적합하게 여겨집니다.
인간은 단독으로 동굴에서 원시 생활하는 대신에 이렇듯, 관계 중시 사회의 문명 사회를 지향하는 것도, 어느 면에서는 생존을 통한 신의 특성을 뽑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죄와 교만의 요소가 포함 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라는 정의 이론이 나오면, 이에 반하는 작위 이론이 성행하는 것이고, 이제는 이로 인한 문명의 합의 이기로 실천되어 발전되고 있는 중입니다.
도가는 무위로 문명에 의해 종속되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지금의 고도로 발전된 문명 사회에 의해 오염된 인간의 생존 본성을 회복하는 대안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대안이라는 것이 문명을 탈피해서 자연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도가가 대안을 제시 못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비우고 버리고 따르지 못하는 것 뿐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고 있는데, 인간은 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안을 진리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인간에게서 찾고자 하기에, 초기치와 경계 조건을 잘못 입력한 결과로 시대에 따른 철학이나 조류는 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부용초로 전락하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진리가 대안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기 때문이지요.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