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society

표절은 필요 악인가?

“창작과 비평의 백낙청 편집인이 표절 논란을 겪은 신경숙 작가를 두둔하는 취지의 언급이 또 다른 파장을 낳고 있습니다.”

멋지고 용기 있는 원로의 코멘트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고유의 창작과 비평만을 고집하였는지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고백이 그냥 나왔겠습니까? 지혜는 지식에서 나오고, 지식은 학습에서 나오고, 학습은 반복적인 흉내에서 나오는 것,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모방이라는 의미가 언제부터로부터  표절이라는 범죄 용어로 둔갑된 겁니다.

유대인들이 세계를 휩쓰는 것이 반복적으로 흉내 내는 학습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요. 이들은, 10번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는 자를 이기는 방법은 11번 반복해서 읽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창작은 표절에서 나오는 겁니다. 아무리 같은 내용이라도 상황 설정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고, 저자의 인생 경륜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겁니다. 

표절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은 문장이라도 상황 적용에 얼마나 적절하고 유효하게 사용 되었는가? 하는 면이 더 장려되고 광범위하게 이용 되는 것이 문학계에서도 허용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표절이라고 하더라도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부분적인 표절을 통해서 전체가 더 생명력이 있는 창작으로 거듭 나기만 한다면야 백 번이라도 천 번이라도 권장 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 해 봅니다.

평생 배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인생 학습이라는 이름하에 인생은 늘 자빠지고 엎지러지면서 자라는 겁니다. 성경에서도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자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하는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조주의 작업 외에는 모든 것이 모방의 산물입니다.

아까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중견 작가를, 표절이라는 잣대 하나로 뿌리까지 송두리채 뽑아 버리겠다고 덩벼드는 문학 사회라면, 그 사회는 이미 문학이라는 용어 조차도 사용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젊은 이들은 좁은 우물 안 세계에서 넓은 시야가 결핍하니까, 젊은 혈기에 괜스리 창의와 창작이라는 이름을 걸고 비판을 하는 거지요. 원로가 괜스리 원로입니까? 원론란 그 이름대로 인생이 별 거 아님을 아시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정치 일각에서 장관 청문회에서 표절이라는 의미를 오도하는 겁니다. 그들은 학문 활동도 문학 활동도 해 보지 못한 처지에, 일치하는 글자 획 수를 문자 그대로 세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는 표절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내용이 무언지는, 혹은 학자나  작가가 그 문장으로 얼마나 고뇌를 거듭했는 지는 전혀 고려에 넣는 법이 없는 거지요.  

그리고는 표절이라는 범죄 용어를 사용해서 간단히 선고해 버린다는 겁니다. 마치 검사들이 최후 기소 수단으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거리인 양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수법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는가? 

판단과 정죄는 작가 스스로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문학 평론 사회 안에서 깊은 고뇌 속에서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창작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류의 결과물이 아니다. 공장에서 호율성을 따지면서 마구 찍어내는 일반 생산품이 아니라, 오랜 인고와 고뇌를 거치면서 포도주가 서서히 숙성 되듯이, 신선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작업으로 간주해야할 것이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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