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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다시 사시는 예수!

행위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있어서 함께 나누어 본다.

내용인즉슨, 성경이 행위를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선행을 다 한다해도 부족하다”, 즉 “최선을 다 하되, 겸손하라”는 의미의 가르침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 키워드는 ‘행위’하는 것이고, 이를 수식하는 내용은 ‘최선’과 ‘겸손’입니다.

허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인간이 하는 행위치고, 원래 인간이 부족해서 그렇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인간 행위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행위란 원래 최선을 동반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교만한 인간 행위의 속성이 아닌가? 그런즉, ‘최선’이라는 의미를 부각하면서,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위험을 감수해야할 이유는 없다. 

바리새인들이 언제 최선을 다 하고자 아니한 적이 있었던가? 

그들에게는 최선이라는 가면으로 늘 부족한 행위를 율법으로 교묘하게 가장해서 정당화 시키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최선의 행위’야 말로, 바리새인들의 전매 특허가 아니었던가? 문제는 최선을 자기들만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교만으로부터 방향을 잘 못 틀어지게 만든 것이었다. 

결국, 최선을 가장한 인간의 능력이나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우려는 교만이 아니라, 오직 피조물의 위치에서 겸손히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하심 대로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 뿐이다. ‘최선의 행위’가 아니라, ‘최선의 순종’이요,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 외에는 우리를 구원 받게 할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겸손하라”는 가르침도, 근본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결코 겸손이 부족함을 느끼는  나의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를 입어서 겸손하게 되어진다는 참 낮아짐의 의미가 흐려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회개가 전제 되지 않는 구원은 없다. 

“나를 수술하는 마음으로 개혁을 단행한다”는 비장한 각오 안에는 필히 회개의 의미가 모두 포함 된다. 회개는 최선을 다하는 행위적 노력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이고, 내가 진실로 죽어 없어지고, 대신에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부활한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살았으니, 이제는 행위도, 공로도 모두가 예수님에게 돌아 간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영원히 없다. 먼저, 최선의 행위도 나와는 관계가 없어야 하고, 급기야는 믿는 믿음 조차도 다 사라져야할 것은, 이제 더 이상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호흡하고, 사시는 예수님만 계시기 때문이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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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서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도그마가 책임의식과 도덕성이 결핍되는 쪽으로 기능한 것 아닌가?

“종교개혁자들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한 것은 행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는 아무리 선행을 해도 모자랄 수밖에 없다”는 겸손을 강조한 것이다. 최선의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다하고도 “겸손하라는 것”이다. 자기 행위를 책임지지 않고 아무리 죄를 많이 져도 교회만 나가면 천당 간다는 건 성경의 왜곡이다.”

-우리는 어떻게 부활할 수 있나?

“부활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리더가 죽어야 리더십이 살아난다.

 – 이동원 목사님 한계레 신문 대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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