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는 좋은 데, 힘든 세상?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집을 떠나 가는게 로망이 된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사랑을 못해 안절부절 난리가 된다.
참 인간은 알다가도 모를, 모순과 역설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천 길 바다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 속은 알 길이 없다 하지 않았는가? 얼마 전에 오랜만의 화려한 산행을 한 적이 있었다. 왜, 산에 오르는가? 하고 물을 때에, 산이 있으니 오른다고 했다. 또 어느 누구는 왜, 산에 오르지 않느냐? 는 질문에, 다시 내려 올 걸 왜 구차하게 오르는가? 하는 우스개 소리도 한다.
필자는 기이하게도 두 가지 다 수용하는 게으른 사람 축에 든다.
산에 오르면 오르고, 말면 마는거다.
즉 선택이 없으면 가고, 될 수 있는 한, 내려 올 산을 오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얼마나 지혜로운 처신인가? 하는 자조를 해 본다.
사실 필자가 산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산에 오르는 것이 육체적인 중노동을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에 보통의 결단과 의지가 없이는 산행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물로 요즘은 산행이 백수들에게는 시간 때우기나 알록달록 패션을 몰고 오는 아름다운 중년 여성들의 날개 몸짓이 좋아서, 옛날 보다는 훨씬 가볍고 즐거운 산행을 기대할 만은 하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산행이 필자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산행을 시작하면, 이유 불문하고 정상을 찍고 내려 와야 한다는 의무감이다. 전문 산악인도 아닌 주제에, 마지막 숨까지 깔딱이면서 구차하게 정상을 찍어아 한다는 중압감이 너무나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산에 가야 하는 것은, 마치 강제로 감옥에 들어 앉아서 지내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한심한 생각도 해 본다. 산에 발을 들이 내미는 순간,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 아니겠나?
얼마나 억압 속에서 산행을 했으면, 정상에 오른 뒤, 그렇게 긴 겨울난 소쩍새 울듯이 ‘얏호’를 크게 내지를 수 있을까? 허긴 요즘에는 그것마저도 내지를 기개를 잃어 버렸는지?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산사와 같이 정적만 흐르는 것은 미치도록 기진맥진해서 눈알이 돌아간 거지요. ㅎ
이제는 일부러라도 육체를 학대해야 하는 편한 시절에 사는가 봅니다.
“좀 불편하게 살자”는 류의 책 제목을 낼 정도로 이 시대가 편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산다는 의미가 이제는 임의로 못 사는 것을 지향해야 될 만큼 사회는 선진화 된 것도 사실이다. 일부러 산에 가고, 일부러 감옥에도 가야할 판의 좋은 세상이 온 것이다.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려, 우리는 오늘도 집을 떠나는 것은 아닌가?
점점 살기가 힘들 정도로 이해 못할 모순과 역설의 야누스적 일들이 첩첩이 주위에 산적해만 간다.
이것이 세상 살기는 좋은 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힘들어 가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