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마음 판 위에 높이 서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인(Sign)이 온다.
일 년에 가장 추울 때에 입춘(立春)이 오고, 가장 더울 때에 입추(立秋)가 온다.
마지막 종말(終末)의 때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 때에는 예수님이 번개와 함께 승천하실 때와 같이 구름 타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에 빠르게 내려오실 것이다.” 기존 교회에서는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문자적으로 이를 실제화 해서 믿는다고 한다. 만에 하나 이를 상징적인 묘사라는 낌새만 있어도 가차 없이 ‘이단(異端)’이라는 낙인을 찍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이를 실제로 믿고 기다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고 상징(象徵)적으로 생각하면, 이를 부드럽게 표현해서 ‘이성(理性)’이라고 결론을 내리는가 보다.
오늘 아침에 어느 분께서, 구약을 빗대어서 “과거와 미래의 기적은 믿으려 하면서 왜 오늘의 기적은 왜 애써 부인하려 드는가?”하는 가르침을 포스팅한 것을 보았다.
이분의 말대로 라면 분명히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모습이, 같은 맥락으로 현실의 기적으로, 실제 미래에 일어날 것을 믿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해 보고자 한다.
한 가지는 그야말로 상징적인 의미로 바라보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기후로 아는 것이나,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를 아는 격이다.
‘나무 가지 비유’는 바로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바리새인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실 때에 사용하신 말씀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성경의 일획 일자도 변개 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고자, 평생을 바쳐서 수호자로 자처 하면서 고집스럽게 그분의 믿음대로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분의 뜻을 이해는 하지만, 공감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부족한 믿음 때문일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만은 없다.
성경은 많은 부분 비유로 표현된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 말씀은 하늘나라의 진실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수준인 언어로 만들어졌기에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성경은 모순이라고 할 수 밖에 달리 이해할 도리가 없다.
이는 인간의 상식적인 수준의 감각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하늘나라의 비밀을 조금도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결국 비유가 아니면, 전혀 이해 될 수가 없는 상황을 담고 있는게 바로 성경의 매력이다.
물론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성경을 마치 동화의 이야기로 하늘나라를 꿈의 동산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하늘나라의 진실 된 거룩한 모습은 감히 인간의 눈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늘나라를 본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의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살아 있는 자 중에 누가 하나님을 맨 눈으로 본 자가 하나라도 있었던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는 어느 인간도 살아날 인간은 없었다. 모세는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만날 수 있었고, 이사야도 그분의 존재 앞에서는 단지 사시나무 떠는 존재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섰을 뿐이다.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었던 근본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과 함께한 그 시절에서도 하늘나라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제자들을 비롯해서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은 정말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소개로 인해서 하늘나라의 비밀이 문자로 써여진 성경 말씀의 깨달음으로 비로소 그 비밀의 실체를 가슴에 새겨지게 된 것 아니겠는가?
이로서 보혜사 성령님을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분으로 성경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그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경지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고, 이는 깨달음으로, 영감으로 써진 감추어진 하늘의 비밀을 실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환히 볼 수 있도록 가리어진 베일을 벗기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은 결코 이야기처럼 별난 현상과 함께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일획 일자도 오차가 없으신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대로 그분의 계획대로 우리의 일상 안에서, 상식 안에서 섭리 하실 것이다.
성령님과의 직접 교통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깨달음으로, 영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이제는 믿는 자들의 마음 안에 들어와 하나님 보좌를 건축하신다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두 번째 지적은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놀래기 위해 기적이라는 쇼를 벌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이 바라는 요행(僥倖)이나 기적의 방법으로 나타내시고자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설령 믿음의 그릇에 따라서, 유연성 있게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해도, 충만한 성령을 담고 있는 큰 믿음의 그릇에서는 ‘십자가 고난’ 이외에는 절대로 요행이나 기적의 모습으로는 이루시지 않는다.
앞으로도, 눈으로 보이는 기적으로 나타나시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재림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은 그 믿음의 마음 판에 새겨져 오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 믿음 위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하늘 영광을 나누면서 사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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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는 세상의 모든 눈들이 그를 볼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을 대동하고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불꽃과 같이 급속히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는가? 아니면 이것은 그저 상징적인 이야기에 불과한가? 아이처럼 이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부르고, 반대로 믿지 않는 것을 이성(理性)이라고 부른다. (Jesus will come again but every eye will see Him at that time because He will come down from the Heaven rapidly like a flame on the cloud surrounded by His angels. Do you believe this, or is this just a symbolic story? Believing this literally as a child is called the “faith.” On the other hand, it is called the “reason” for not believing.) 08/11/2015 글: Shi-Chang Wooh (우 시창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