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지혜, 깨달음!
물들어 올 때 배 띄우는 선한 행위가
깨달음의 지혜다.
깨달음과 중용의 지혜로 인생 경륜의 나이테가
굳어지는 것이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추구하는,
인간 존재를 위한 성장의 핵심가치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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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중용)과 中道(중도)에 대하여)
필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중용(中庸) 혹은 중도(中道)의 마인드와 그 실천의 삶에 대하여 상념에 잠기곤 한다. 이를 체용(體用)이라는 개념에 대입한다면 중도는 體에 해당하고 중용은 用에 해당한다. 중용과 중도는 둘 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고 조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의미이면서도 그 개념은 명백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도와 중용은 균형과 조화 내지 타협과 융화를 추구한다. 중도는 다양한 의견과 견해를 조화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입장을 피하고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취할 수 있는 태도나 상태이다. 중용은 양쪽의 극단을 결합하거나 서로 상반되는 가치나 이해관계를 조화롭게 합치시키는 과정에 방점을 두는 행위라고 본다. 석가모니의 중도는 양끝단을 알고 난 후의 도(道)를 의미하고 유가에서의 중용은 양극단을 포용하는 중심점(中心點)을 지향한다고 본다. 일례로 나아가고 싶으면 나아가고 물러나고 싶을 때에 물러나는 사람이 중용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중용의 도리를 행하는 인물을 으뜸으로 평가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후한 점수를 주는 반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부류를 가장 낮게 평가 하였다. 즉 용기있는 사람들을 중용을 행하는 인물 아래에 위치 시켰지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사람을 두고서는 도를 해치는 사람으로 여기며 하잖게 대했던 것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을 두고 향원(鄕原)이라고 치부하였는데 향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위해 여론에 영합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세간에서 3류 혹은 5류의 집단으로 분류되고 있는 선출직 위정자들에게 중도란 약삭빠른 기회주의자로 치부될 것이다. 붓다는 중도를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거문고 줄에 비유한 바 있다.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현악기의 줄이 너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적당한 강도로 셋팅시켜야 그 악기 마다의 고유하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즉 중도라는 개념은 중간이라는 Middle이 아니라 중심의 센터(Center)이다. 또한 그 Center는 표면적인 중심이 아니라 무게중심인 것이다. 중용(中庸) 또한 가운데 지점을 추구하는 행위가 아닌, 때로는 기우뚱한 상황일 수도 있고 극단 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
활쏘기에서 시위를 과녁의 어느 지점을 겨누어야 하는지는 사대(射臺)에서 과녁과의 거리, 시위의 텐션, 풍속(風速)과 풍향(風向) 등에 따라 각각 달라져야 한다. 따라서 명사수라면 그러한 이치에 따라 과녁의 중심으로부터 정확한 편차를 적용하는게 중용이다. 활시위를 어떻게 어디를 겨누든 과녁을 목표물로 삼는다는 점은 중도로 볼 수 있다. 바람이 전방 과녁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부는 조건이라면 활은 과녁의 중심을 조준하면 안되고, 바람의 세기와 시위의 강약에 따라 과녁의 우상단 쪽으로 이동시켜 겨냥해야 한다. 따라서 명사수라면 그러한 이치에 따라 과녁중심으로부터 정확한 편차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살아가면서 어떠한 규범을 벗어나는 사안이 발생할 때면 현실은 새로운 규범을 창출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 규범에 따르는 행위 또한 중용인 것이다. 올바름과 좋음이라는 것도 상황에 따라 그 중요도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도덕적인 규범을 따르고 올바른 것이면서 주관적인 평가에 부합 할수록 좋은 것으로 받아 들여질 것이다.”
-정신건강증진 전문가 임주완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