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십자가 웬수랍니다!
“목사로 살아야 하는 내 현실이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력을 확보하기 어렵게 한다. 그것이 한없이 미안하고 괴롭다. 자책의 밤은 이렇게 깊어간다. 내가 걸어야 하는 그 길이 가족을 이런 식으로 희생시켜야만 갈 수 있는 길이란 말인가? 설령 그렇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이 과연 믿음인가? 어째든,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소위 ‘목사의 소명’은 이렇게 뻔뻔함과 낮 두꺼운 철면피의 삶을 담보로 형성되는 것인가보다. 에라이 이 새끼야. ㅜㅜ.“ – 김관성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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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약함이 강함 되게 하심이라.
십자가 외에는 모든 자랑이 허사라.
웬수같은 처자식 생각이 오히려 십자가를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니, 그 또한 영광이로다. ㅋㅋㅋ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들이 십자가 짐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성직자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 부름 받은 사람들은 중세 가톨릭 신부들처럼 식솔(食率)을 거느리지 않고 수도승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불가(佛家)에서도 결혼한 사람이 어느 날 스님으로 출가 할 때에는 가족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남겨둔 가족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했지요. 처자식들도 어느 면에서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게 해서 기실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보시(報施)를 하는 격이지요. 사랑해야하는 이유랍네다요. ㅎ
소위 성직자는 무심(無心)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음(福音)대로 살기 위해서는 위의 경우와 같이 믿음의 선배들의 길을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 아닐까? 생각 되네요.
처자식 식솔들을 뒤에 남기고 아브라함이 떠난 것처럼 떠나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겁니다. 어차피 죽어서 깨어질 가정이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결단 내어 하나님의 영원한 부름에 순응하는 것도 성직자의 바른 길이 아닐까 합네다. ㅎ
너무 심했는가? 늙어서 노망이 든 게지요.
목사라는 타이틀이 힘들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목사마저도 굴레를 벗는 결단이 필요한지도 모르지요. 밥이냐? 목사냐?도 결단이 필요한 소중한 선택인지도 모릅니다요! ㅎ 구할 소중한 영혼이 있다면, 목사 이전에 하나님이 솔선해서 하십니다.
목사가 오히려 육의 올무가 되어 자유로운 진리의 영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될 수도 있는 게지요. 하나님은 목사보다 위대하십니다.
인간은 인간적인 위로보다도 진리를 향한 상한 심령의 확인이 필요한 때, 많은 것을 염려하는 마르타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빼앗기지 않을 것을 붙잡고 있는 마리아를 오히려 칭찬했답니다. 진리를 향한 영혼의 위로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만 내려옵니다.
육을 부인할 때에 비로소 내려오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육의 부인이란, 결국 세상에서 맺은 모든 인연을 부인해야 하는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거지요. 소중했던 세상 인연을 성경에서는 우상(偶像)이라고 하는 종류의 것이랍니다. 우상은 넘고 부시고 가야할 우상 신전입니다. 가족이 우상입니다. 형제 부모가 우상입니다. 밟고 넘어 가야할 세상 모형(模型)입니다.
“현실이 십자가 웬수랍니다!“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