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Style

성숙한 사람, 선택된 사람!

“성숙한 사람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은혜를 알게 하는

길고 고되고 어둡고 협소한

긴 동굴을 벗어나는 험난한 과정이다.”

성숙한 사람은 선택된 사람이다.

♡도천 곽계달♡

“‘돌을 씹어 삼키더라도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그때 그 순간 이런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을까…..

결혼하고도 집 걱정은 안 하고 살았다. 어려서 아버지 등골을 빼 먹고 자랐는데, 그것도 부족하다 여기셨는지 성인이 되었어도 나를 챙기려던 아버지 덕이었다.

중년에 맞닥뜨린 일이니 집 없이 떠도는 사람으로 지낸 것은 오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불행이라는 것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내가 살던 집이 타인의 집이 되거나, 모든 것이 떠나가는 것, 혹은 매일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옷매무새를 봐주기를 바라던 그녀가 순간 사경을 헤매며 병상에 누워 있다는 것과 같은 불운에 맞딱트리는 것…..

애초에 그래왔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중년이 다 되어 경험했으니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썩 기분 좋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밥 세 끼 먹으면서 살만했고 불평불만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난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더 어려운 사람들 틈에 끼어 어린 시절을 보낸 까닭일지도 모른다.

생활이 좀 달라졌다고 티도 내지 않았고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부끄럽다고 징징거리지도 않은 것은 그만큼 채워질 공간과 마음에 여유가 넓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돈이나 명예 좀 쫓아 보겠다고 그악스럽게 매달려 봐야 정주영 회장님은 결코 될 수 없겠다고 일찌감치 판단하고부터 그러한 것들과는 거리를 두고 무감각하게 살아온 까닭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려서부터 나에게는 정주영 회장님 말고는 별나게 잘 나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못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먼저 살던 곳으로 갈까? 아니면 좀 더 가까운 곳으로 갈까?”

“여기도 좋은데 굳이 가야 한다면 그냥 다 정리하고 산골로 갈까?”

어디를 가더라도 운전대 대신 책을 잡는 습관이 생겼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녔는지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십 년 가까운 시간을 전·월세를 전전긍긍하다가 다시 집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인지 대단한 심경 변화도 없었고 특별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다시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기쁨보다 생각대로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출간된 책 ‘슬픈 날의 행복 여행’ 은 나의 삶에 큰 변화를 줬고 이어서 두 권의 책을 쓰면서도 내면은 한 뼘 더 성장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불운한 일은 언제나 다른 불운을 함께 몰고 오기 때문에 한 가지 불운만 닥친다면 마다치 않겠다.’

그리스 크레타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글에서 보았다. 불운한 일은 또 다른 불운을 몰고 온다는 것을 체험했는데, 정도가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심장은 편치 않았는지 내내 요동치다 이내 그녀의 정신까지 잃게 하더니 몸은 죽은 자의 것처럼 변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곤 했다. 그런 모습도 오래 볼 수 없겠다는 불안감에 길에서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단 마음에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2011년 가을에 떠난 우리는 이듬해 가을에 돌아왔다. 긴 여행을 다녀오니 이런저런 연유로 집과 땅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는 유학길에 오르자마자 자기 엄마 수술 날짜에 맞추어 한 달도 안되 귀국했다. 굳이 말 하자면 중학교 졸업 신분에 앞이 캄캄한 상태가 된 것이다. 심장 시술과 동시에 새로운 진단을 받은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 오자마자 병실이 숙소가 되었으니 휴업 중이던 회사는 회사 체질 상 재개업은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진단서에 명기된 진단 내역 중 하나는 이랬다. ‘5년 생존율 5%.’

미래의 불안감이 홍수에 떠밀려 내려온 산더미처럼 덮쳤다.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을 다시 만드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나를 죽일 수 없다면 나를 더 강하게 일으켜 세울 뿐이라고 니체가 말했던 가.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도 두려움과 눈물을 동시에 삼켰다.. 돌을 씹어 삼키더라도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명동, 잠실, 동대문… 시장통을 배회하면서 남자들이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특별한 아이템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물건들을 내다 파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에야 거의 모든 사람들 그렇게 일하며 산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이랬다.

“남자들도 이런 일을 하는군…….”

자신감이 좀 올랐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병상에서 신음하는 아내와 졸지에 자퇴 학생이 된 아이를 재우고 새벽 두 시에 동대문을 향했다. 옷, 가방, 엄청난 물건들이 오고 갔다. 한 시간 동안 쇼핑몰 문턱에 앉아 골몰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15년 이상을 무역 일에만 매달리거나 여행만 하던 나에게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현실이 서러웠다. 술에 취하고 비에 젖은 나는 주저앉았다. 새벽 3시, 밤부터 내린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자신감은 다시 자괴감으로 바뀌었고 무능력한 자신 때문에 나는 슬펐다. 떨어지는 빗물은 하염없이 나를 적셨다. 얼굴을 들었다. 그때, 그 순간. 아주 오래된 거래처, 그것도 단 한 번 내가 가죽 원단을 수입해 줬던 가방 제조회사 대표가 나를 용케 알아보았다.

회사를 휴업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근 일 년을 가족하고 떠돌아다니며 지내다 뜻밖에 곤경에 처한 나는 반나마 얼빠진 모습이었으리라. 오만했던 시절 떠올리면 땅으로 꺼져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와의 조우는 행운이었다. 옛 기억이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우리 물건은 다른 상점에도 배송이 되었다.직원들은 매장을 지켜주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아낸 지난밤의 서러웠던 슬픔은 일부 사라졌다 . 수술을 끝낸 그녀는 요양을 떠났다. 항암을 시작하였고 정기적으로 검진 받은 결과를 문자로 보내왔다.”나 삼개월 벌었어”

나도 삼 개월 살고 죽을 사람처럼 서울 구석 작은 모퉁이에 궁둥이 하나 꾸겨 넣을 수 있는 곳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진 시간이 삼개월 뿐이 없는 사람처럼 평생 안 읽을 것 같던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삼 개월만 살다 갈 사람처럼 힘겹다 여겨지면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별에 편지를 띄우듯 수취인 없는 편지를 썼다. 나는 매일 노래를 들었다. 임재범의 「고해」와 「너를 위해」가 멈추면 이어서 웨스트라이프의 「You Raise Me Up」이 매일 흘러나왔다. 이국의 낯선 거리를 달리는 차에서 아이가 목청을 높이면 아내는 흥얼거렸고, 나는 운전대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며 부르던 곡이었다. Over the rianbow~ 모니터에서는 여행 내 찍은 사진들이 슬라이드로 돌아갔다. 노래가 반복해서 흘러나오면 나도 소원을 빌며 흥얼거렸다..

‘어느 날 나는 별에 소원을 빌었어

그리고 구름 저 너머에서 깨어났지

걱정들이 레몬 방울같이 녹아 버리는 곳

굴뚝 꼭대기 저 너머에

그곳이 네가 나를 찾을 장소야'”

-남기환님-

#슬픈날의행복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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