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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우리에 속한 권한이 아니다!

성화란 과연 무엇인가?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근본 지혜라’고 하는 말씀으로 성화의 의미를 설명할 수도 있다.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적절한 영적 긴장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나, 흔히 종교인들이 보상 심리로 가지는 ‘자신 없음’으로 가지는 두려움과는 확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화란, ‘예수와 같이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도 하는 한편, 또한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라고도 한다. 성화란, 인간이 이루어 놓은 도덕과 윤리와 문화의 기준에 완전함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철저히 깨고 부인해야 하는 하늘나라의 기준을 동시에 만족하여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허긴 이것조차도 하나님이 하신다고 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는 그 의미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절대로 세상 기준을 하늘 기준에 덧입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 기준을 부인하는 것이 하늘의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하시는 일은 세상 도덕에 애써 노력해서 행위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로는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우리는 세상에 물든 옛 사람을 부인하는 십자가 생활을 하지 않는 한,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고 핍박 받는 예수의 십자가 길을 따르는 생활을 하지 않는 한, 하늘의 기준인 성화와 영화에 만족될 수가 없다.

성화란 세상 기준에 적응된 자기의 의를 하늘의 기준인 하나님 의로 바꾸어 가는, 십자가 고난의 길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영적산물이다. 이 십자가 성화의 길 위에 서 있을 때만이 하나님 은혜의 손길이 우리를 인도하게 된다. 서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미리 선택되고 예정된 사람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성화의 길로 인도된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러니 정하신 이도, 의롭다 하신 이도, 영화롭게 하시는 이도 모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 권위 아래에서 섭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잠히 그를 바로 보는 자세야 말로 성화의 바른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성화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덧입은 은혜라고 선언하는 백성이야 말로 진실로 성화된 자녀라 할 수 있다. 성화는 우리에게 속한 권한이 아니다.

그런고로, 성경학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흔히 스스로 거룩한 존재로 성화되기를 강요하는 행태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을 호도하는 어리석은 작태가 아닐 수 없고, 스스로 성화 되려는 생각이야 말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대 죄악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할 것이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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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시리즈죄의 심각성)

그리스도인은 성화의 과정에서 방관자로 있을 수 없다. 믿는 자들은 경건한 삶과 영적 성장을 위해 육신의 정욕과 치열히 싸우도록 주님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다. 동시에, 진정하게 의롭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최근 며칠 간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성화는 주님과 그의 백성들이 협동하여 이루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도바울은 이 협력의 역설적인 본질에 대해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 성도들과 우리에게 주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진정한 영적 성장의 의미를 알리고 이를 격려하는 다섯 가지의 필수적인 진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주님의 사랑과 본 되심, 순종의 필요성, 자기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는 것이 성화의 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았다. 오늘은 사도바울이 내세운 필수적인 진실의 마지막 요소, 죄의 심각성에 대해 살펴 보려고 한다.

주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시며, 용서하시기를 즐거워하시는 분이시지만, 성도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으신다. 바울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라고한 사도 요한의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아는 신실한 성도들은 항상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간다. 구약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시편 119편 18절, 잠언 1장 7절, 9장10절).”라는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영원히 고통당할 파괴적인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절망적인 심판으로 몰아넣는 소망이 없는 공포심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부터 오는 징계를 피하고자 하는 신성한 근심이며, 경건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유혹과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순종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깨끗한 양심으로 유혹에 단호히 맞서는 자세를 가지게 한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면 절대로 교만해질 수 없다. 이러한 태도는 끊임없이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교만과 미약한듯하지만 강력한 부패한 마음을 인지하게 한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분을 불쾌하게 할 어떤 것도 피하고자 하는 두려움이다.

믿는 자는 죄를 범하는 것을 심각하게 두려워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열렬한 욕구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나약함과 유혹의 강력한 힘을 인식하고, 죄에 빠져 주님을 슬프게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경건한 두려움은 다른 성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자신의 사역에 타격을 주고, 믿지 않는 세상에 기독교의 부패한 이미지를 주므로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고, 그 결과로 성도들이 기쁨 가운데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죄의 결과를 이해해야 한다.

경외심은 단순히 죄성과 영적 연약함을 깨닫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깊은 존경과 사랑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엄숙하고 경건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모든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거역하기보다는 모든 일에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기쁘게 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려는 신실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주님의 훈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히 12:10).”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을 향한 이러한 경외심은 성도들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열심히 하게 만든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 6:13).” 이 기도는 믿는 자의 의무와 하나님의 능력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긴장을 다시 반영하는 기도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슬프게 하고, 자신의 영적 성장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죄의 결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본, 순종의 필요성, 주님 앞에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책임 등과 함께 사도바울이 말한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에 박차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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