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대하는 참신앙의 모습?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초막절을 정해 놓고, 천막생활을 하면서 선조들이 생활한 광야생활을 기념하고, 더불어 인생의 덧없음을 경험하면서 마음을 굳건히 다진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천막생활에서 무엇을 배우고 다짐할까? 그래서 그 다짐으로 지금의 이스라엘을 지속적인 세계 제 1의 국가로 유지하는 지혜를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겠다는 것인가?
특히 한심한 것은 이런 비 진리적인 사실을 깨어 부수고, 진리의 말씀을 건축해야할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에서 공공연히 신앙의 롤 모델로 삼기를 소리 높여 주장한다는 서글픈 사실에 있다.
그들의 외식이 무엇이 부러운 대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자아만 잔뜩 키우는 마귀 사탄의 종의 행각이 아닌가?
하나님의 심판은 오로지 비 진리적인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적용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진리의 성전이 되어야할 교회에서조차도 분별력 없이 성도들을 율법의 희생물로 삼아서 심판의 단두대로 인도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권세에 잡힌 채, 죄의 노예로 살기를 자처하면서, 율법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상징적인 진리의 의미를 망각한 채, 진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그릇에 담긴 진리는 부인하고 정작 부인해야할 껍데기인 율법의 그릇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진실이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껍데기인 율법이 아니라, 용서와 은혜와 사랑이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보고 죄의식을 느껴서 두려움으로 열심을 내어 행위로 다투어 율법을 섬긴다면, 이는 분명히 과녁을 잘 못 정한 죄에 해당된다.
만약 율법을 바라 볼 때, 율법을 통해, 우리의 한심한 탐욕을 보게 하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진정한 사랑과 무한한 은혜를 만날 수 있는 깨달음을 건진다면, 우리가 할 일은 율법의 열심히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능력을 부인하고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에 순종하고 동행하는 에녹과 엘리아의 믿음의 세계로 인도 받게 될 것이다.
진리와 비 진리의 차이는 선과 악을 구별하여 무조건 악을 폄하하는 무지한 자세가 아니라, 악과 선이 협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악마저도 선한 도구로 여기는 자세라 하겠다.
아무리 선악과가 사람에게 죄의 동기가 된다 할지라도,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의 창세전에 세우신 선한 뜻을 이해하고 깨닫는다면, 선악과가 바로 생명 과일로 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신앙의 참 모습이다.
하나님의 영이신 진리의 영, 성령의 흐름 속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세상 율법을 대하는 자세, 즉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음인 진리를 대하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심비에 새겨야 한다.
껍데기인 율법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율법의 그릇에 담긴 하나님 뜻인 진리와 사랑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불순종과 순종의 갈림 길을 결정한다.
율법은 율법에 대해서 이중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보는 수단에 그치면, 선악과 수준에 매이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님의 뜻과 다른 과녁을 겨냥하는 것으로 해서 진정한 죄의 범주에 들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서 신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죄에서 그치지 말고, 진리를 만나도록 인도하는,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몽학선생으로 여긴다면, 이것이야 말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는 진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는 겁니다.
율법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몽학선생이라고 생각하면 되지요. 그러나 율법을 우상화해서 숭배하는 분들의 오해가 많아서 율법이 아니라, 율법이 비추는 진리의 빛을 봐야합니다. 이때 빛에 대해서 율법을 어둠이라고 표현하고,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기 위한 의미이지, ‘좋다’, ‘나쁘다’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미스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의해 창조 되었기에 피조물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보는 한 세상에 악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하고, 대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자유하는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율법의 정신을 사랑으로 읽는 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 즉 진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긴 내용은 율법을 행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겨질 때, 두려움으로 지키고 숭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자유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율법이 완성 되었다”고 하는 거지요.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시려 이 땅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게 하려 하심 입니다. 아멘!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