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Style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고난!

오늘 점심 약속이 세초역 2번 출구에서 가까운, 남도 식당인 울돌목에서 식사가 끝나고 다음 약속까지 여유가 있어, 평소에 방문하고 싶어한 사랑의 교회 로비에 와서 앉아 있다. 오늘은 충분한 시간 덕에 북관 지하로 부터 해서 교회 내부를 돌아다 보았다.

드림센터와 미션센터로 남북관 2개 관이 연결 통로로 이어져 있고, 광장에는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고, 예루살렘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잠시 엘리베이터 앞에 걸려 있는 모니터로 부터, 언뜻,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자막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순간, 이런 생각이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필히 고난을 받아야 한다.” 

물론 세상에 같은 생김새를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진데, 각각이 가지는 고난의 모습도 다 다를 것인 즉, 고난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고난의 십자가는 필수다”라는 관점에는 추호의 변화도 없다. 물론 인생 사이 사이에는 분명히 고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복한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고난의 수준을 높이 부르짖는 이유는 고난의 아픔이 너무 모질기 때문에 잠시 오는 행복한 순간으로 인해 고난의 진정성을 잊어 버릴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인생의 반 반이 행복과 고난이 나뉘어져 있다 해도 필자는 이를 따로 구별하지 않고, 차라리 인생의 모두가 고난이라고 규정 짓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속이 편하다는 계산이 심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행복하기 위해 고난을 견디고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 보다는, 단지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핑계를 들이 댄다는 약한 심정을 가지기 싫다는 이유도 있다. 이러한 생각 뒤에는 세상 행복은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 고난은 실제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필자가 이러한 변하지 않을 믿음과 철학을 가진 것은 육십 성상을 보내면서 터득한 나름대로의 세상 인생 깨달음이 뒷밭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생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친 인생사 모두가 마치 사막에서 만나는 신기루와 같은 허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원과 영원 사이를 잠시 잇는 찰나의 존재는 실제가 아니라 영원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가 일생을 통해서 끊임 없이 추구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리라. 

자기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야 말로 존재의 허상을 벗어나서 영원한 시간 속에 속하는 실재의 모습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성을 통한 신성을 혀복하는 것이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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