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독립심은 유죄인가?
6-70년대의 남성의 로망은 독립하는 것이었다.
필자도 이 범주에서 예외는 없었다.
그래서 65년에 홀로 고향이었던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교를 입학했고, 그 이후 줄곧 소위 집 떠난 유학생활을 유지하게 된다.
“말은 제주도에 남자는 서울로”라는 캐치플레이를 걸고, 누구나 현실을 박차고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그 시절, 정말 피끓는 청춘을 주체 못하고 달리고 싶었던 필자에게 당시의 선택이 없었던 폐쇄된 사회 분위기는 그야말로 울타리를 벗어난 망아지처럼 주체를 못 하고 좌충우돌하며 주위를 소란하게 한 것 같다.
고등학교와 대학, 대학원의 학업까지, 그리고 이어진 해외 유학과 이후 인생 여정 모두가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하는, 홀로 서기라는 인생 대명제를 실천하기 위한 외로웠던 날개짓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독립심을 향하는 발걸음에는 많은 경우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십자가 짐에 대한 잠재 의식을 못내 떨쳐 버리지 못했고, 이로 인해서 가끔은 주위 사람들에게는 부담으로 전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남들의 눈에는 이러한 모습이 비인간적이거나, 너무나 완벽해 지려는 완벽주의자로 비쳐지기도해서 오해도 많이 받기도 하게 된다. 이 모든 흐름에 대한 작용 반작용의 소통의 열매들은 가정에서 먼저 맺히게 된다.
재미 있는 필자의 이러한 독립심 지상주의에 의한 결론은 필자의 의도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의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의 생활은 물론이었고, 지금은 이것도 모잘라서 북한산 끝자락에 있는 조용한 집에서 칩거에 가까운 완전한 독립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홀로서기를 위한 독립심 기르기의 의도는 부모의 영향력으로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는 것이었는데, 만에 하나 이것이 왜곡 되어서 부모 자식 간에 소통의 단절로 변질되어 나타나게 된다면 이는 처음 의도된 책임 있는 남자가 쟁취해야 하는 진정한 독립의 의미가 상실 되는 것 아니겠는가?
어쨌든, 모순의 동물인 인간인지라, 처음 의도된 목적과는 다르게 나타난 결과는 자식들이 모진 세상으로 부터의 완전한 경제적인 독립을 이룬게 아니라, 필자가 주장하는 부모로 부터 받았던 부담으로 부터의 독립만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나름 대로의 벗어 나고자하는 올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숨 막힐 듯한 변화 없고 지루했던 현실로 부터의 탈출이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바로 독립심이라는 그럴듯한 철학 용어를 갖다 붙인 것 아니었겠는가?
이제 60 중반을 들어선 지금에 와서는 독립심이라는 단어 보다는 자유라는 용어 사용에 더 익숙해져 살고 있다. ‘자유’, ‘무엇으로 부터의 탈출’ 이것이 모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에 대한 로망이 아니겠는가? 그럼 결국은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의 자유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육으로부터의 탈출이 영으로의 자유로 통해야 하지 않을까? 진리가 영원히 자유케 하는 영혼의 자유?
굳이 ‘무상’이라는 불교 철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세상 변화에 적용하려는 모든 생명의 몸부림이 마지막에는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즉 자신어 육으로 부터 진정한 영을 회복하는 의미에 다다르게 된다.
처음에는 부모로부터의 탈출에 이어서 가정과 세상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자신으로부터의 마지막 탈출로 이어지게 되면서, 여호와 창조주께서 그분의 목적대로 지으신 변화하는 우주 만물 법칙에 적자생존의 법칙을 충실히 지키게 하시고자 하는 인간 본능적 요소를 잘 따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왜곡된 독립심은 과연 유죄인가?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