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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깨는 믿음을 지켜서 면류관에 이르자!

인간은 생긴 그릇 만큼만 담게 되어 있다. 

넘치게 부으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과하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과유불급이라고 부른다.  

사람들 간의 관계도 이와 같이 그릇에 맞는 설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릇에 비해서 지나친 기대는 오해를 일으켜서 오히려 해를 일으키기가 십상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그릇의 크기에도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그릇의 생김새에 따른 변수도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란 원래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와 부피를 예정받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에 변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은 죽을 때 까지 생긴 대로, 받은 양 만큼만 행하다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문명이 발달 될수록 사람들 마다 , 지닌 그릇들이 하나 같이 과대 포장 되거나 거품으로 덮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 분수를 잊어 버린 채,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자기 존재를 알고,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 말로 모든 것 보다 우선시 되어야겠다. 

그렇다고 타고난 그릇 대로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평생 생긴 그 모양 그 꼴로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인간이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문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죽어야 변한다”는 진리에 충실하면 어떨까? 

“죽는다”는 것은 아마도 부여 받은 원래의 그릇을 깨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변하기 위해서는 “그릇을 깨어야 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살아서도 그릇을 깨는 가혹한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 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 “죽어야 거듭난다” 는 말이 있다. 

결국 살아서 변하기 위해서는 거듭나는 변화를 요구한다. 사실 거듭나는 변화란, 회개와 같은 것이다. 회개란 자신이 지금껏 향하던 길을 180 도로 완전히 방향을 바꿔서 향하겠다는 결심이다. 거듭난다는 것도 이와 같이 자신의 그릇을 깨고 완전히 새로운 틀을 짜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 듯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았으면서 죽어서 180 도로 변하는 경우는 거의 기대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원래 인간이라, 인성과 신성 사이에 머물면서 갈등하는 존재라고 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머뭇거리면, 대철학자 데카르트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라는 정의를 내렸겠는가? 그 만큼 약한 인성과 절대적인 신성 사이에 놓인 골짜기의 갭은 깊기만 하다. 

어쩌면 변한다는 의미는 인성의 지저분한 그릇에서 신성의 위대한 그릇으로 갈아 엎는 것인지도 모른다.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변한다는 것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인성에서 신성으로 나아가는 변화는 비록 하루 아침에 단숨에 이루어져야 하는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서서히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 져야 하는 모순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앙적으로 이 현상을 비추어 설명해 보면, 구원은 즉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성화의 단계는 영화의 경지에 이를 때 까지 길고 지루하고 험난한 길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을 존 버년의 ‘천로역정’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누구에게는 변화란 인성과 신성 사이의 거리 만큼이나 지루한 여행 길이 될 것이나 그 변화를 대하는 마음 자세에 따라서 구원과 성화를 동시에 완성 시키는 급변화의 축복을 누릴 수도 있다. 그 마음의 자세는 그 변화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 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깨어짐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인정하는 만큼, 그 변화 속도가 결정되는 것이라 하고 인정하는 깊이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믿음의 깊이의 수준에 따라서, 구원에서 성화가 완성되는 영화의 종착역 까지 거리가 조절 된다는 설명이다. 믿음의 최상급은 구원과 동시에 영화가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를 나타낸다. 이때의 믿음은 세상 차원과 하늘 차원을 잇는 초특급 타임머쉰(Hyper Super Time Machine)과 같다. 

그러나 성경에는 절대로 믿음만으로 구원은 얻지만, 구원과 성화가 함께 이루어져 영화에 초특급 열차를 타게하는 믿음의 경우는 결단코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믿음이란, 구원을 통한 마지막 성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끝까지 이어져서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는 순간 구원 받았지만,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때 까지, “매일 죽노라” 하고 고백을 했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의 십자가를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죽는 순간까지도 복음 전도로 인한 핍박과 고통이 끊임 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가 죽기 전, 딤후 4-7, 8장에서 마지막 담대한 고백으로 그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사실과 이후에 그가 받을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확신하는 것을 통하여 보더라도 믿음이란 죽을 때 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지켜가야 하는 고독한 투쟁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릇의 깨어짐을 통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수고를 능히 감당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이 준비 된다는 진리의 가르침을 마음판에 새기면서, 가야 할 길을 무사히 마치도록 주님께 기도로 구해야 하겠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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