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모순(矛盾)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섭리(攝理)?
찜해서 천천히 보기로 했지요.
드디어 오늘 아침, 마침 누수로 뚫린 천정 보수하러 오신 분들이 공사하는 동안,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본 내용을 모두 섭렵할 수 있었지요.
양승훈 원장의 주장(창조과학을 떠난 4가지 이유)에는 하등의 반대할 논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 했지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젊은 지구론’과 다른 하나는 ‘노아의 대홍수’ 설입니다. 그러나 먼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의 창조론 주장과는 다소 다른 내용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창조론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단지 지금까지 성경을 기반으로 한 창조론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어, 장차에는 성경과의 긴밀한 타협점(?)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지구의 나이가 6-7 천년(성경적 해석)이 아니라, 수십 억(46억)년이라는 사실은 방사선 동위 원소 법으로 이미 만천하에 밝혀진 사실이고, 노아 대홍수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그것도 한 번(단일격변론(單一激變論))이 아닌, 여러 번의 홍수로 인한 다중격변론(多重激變論)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기본적으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문제들과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의 주장에 대한 내용과 일치하는 자세들을 견지하면서도, 겉으로는 이와 다르게 각자가 바른 주장을 하는 것과 같은 이중적인 모습들을 취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창조론자들의 문제점은 신학지식과 과학지식을 함께 겸비한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분들이 이 분야에서 종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학과 과학이 창조설(創造說)과 진화설(進化說)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만큼, 이 두 주제가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에 해당하는 어려운 기대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전제로 겸손한 자세로 주제를 대해야 되겠지요.
양 원장은 이에 대한 양해로, 중세 갈릴레오의 지동설(地動說)을 하나의 좋은 예로 들고 있지요.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한 당시의 분위기는 분명히 지구가 중심으로 모든 항성들이 움직인다고 믿은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해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처형 직전까지 몰고 갔고, 현대에도 여전히 문자적 성경을 신봉하는 자들이 64가지 성경 구절을 들어서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문자대로 성경 내용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의 입장은 당연히 젊은 지구와 한 번에 이루어진 노아의 대홍수를 주장할 수밖에 달리 뾰족한 선택이 없는 형편이지요.
그렇다고 갈릴레오의 주장대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 식의 현대판(現代版) 갈릴레오가 바로 양 원장의 입장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집니다.
과학의 발전도 분명히 하나님이 내리신 축복이란 것을 믿지 잃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보는 관점에서 이와 다르게 과학의 발전을 세상의 재앙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는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부인할 수만은 없는 과학적 증거마저 부인하려 한다는 자체는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늙은 지구설’과 ‘다중격변설’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어떻게 성경의 말씀을 달리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최근에 수메르 문화가 발굴 되면서, 문자해독을 통해서 노아의 대홍수를 포함한 창세기의 많은 부분이 당시의 내려오는 여러 전설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사실들을 발표하기에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세상만사의 이치가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의해 움직인다는 대전제를 고수하기만 한다면, 일련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모순들 자체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내재된 것으로 여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지, 그 외의 모든 것은 인간의 야비함이나 간사함으로 쉽게 변질되고 선악과(善惡果)의 속성으로 편협해진다는 진실을 받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지동설대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지만, 누구도 이를 들고 천동설로 해석 되는 성경을 시대에 뒤 떨어졌다고 부인하려는 의도는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모든 것이 우리들 마음에 달려 있다”는 상식에 입각해서라도,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애써 부인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갈릴레오의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좋은 기회로 양 원장의 입장을 바라보면 어떨까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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